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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장

투가리 부젓갈 2023. 9. 17. 09:16

아무러크소니 2편 狂亂의 章

◎ 글을 일으키면서 하는말ㆍ

다음 나오는 글보다 앞서있는 정리치않은 초안이 있는데 그를 살펴본다면 운명론적인 內容으로써 萬森羅가 어느 時期에 태어나던가 만들어지면 좋지않을까하는 즉 合當치 않을까하는 슴에 대한 理論定立한內容이다。이를 救援合이라 名名하여 봤는데 이를 정리타보면 그 내용분량이 尨大하고 일면황당무궤함이라 여지껏 쓴글도 邪鬼한테 놀아난것처럼 여겨지는데 이는 더더욱 세상 무슨 미련을 떨치지 못해서 목적을 추구하는 글로 世人을 어지럽히고자 하는 것 같음이라 또 世上이 되어돌아감이 흡사 탈쓴 귀신들이 미쳐날뛰고 활보하는 것처럼 삿된 정신 세계는 그리고 있음이라.邪鬼의 괴뢰로 농단당하는 것같아서 정리를 하지 않기로 하였다。혹이 말하길 글도 글 같잖은 글이라서 창피하거나 정리치 않을려는 구실을 늘어놓는다 할런지모르지만 바로 내 말씀이 그말씀이다 글도 글 같잖은 글 내머리 실력이 이것밖에 안되나해서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럼 내가 지금 정리때 와서 이런말을 왜하느냐하면 그 구원 合이라는 명칭을 차후에 나오는 글들에서 자주 인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대체 무엇을 가르키는 것임으로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이렇게 몇마디 初人에 적어 보는 것이다(그래도 궁금타 한다면 하찮은 글이나마 초안本文을 그냥 남겨둘터이니 훗날 찾아와서 볼테면 보라) 그럼 이제부터 전격적으로 정리에 들어가기로 한다.모두가 미치광이의 정신 분열 증세를 띈 말들이다. 미리 정신 돌은 자의 말인줄 알고 읽는다면 어느정도 미친자의 광분하는 말에 수긍이 갈지모르리라.

◎ 공간 장소 合은 中央이란 관점으로도 놓을 수 있다.일정한 地形 地勢는 가운데가 모이는 곳 또는 모인 곳임으로 合이다。이와 마찬가지로 일(行事)에 있어선 그일(行事)에 適當한것을 合이라 한다。가령 어른께서 호박씨를 심되 적당한 장소에다 구덩이를 파고 밑거름을 잘한다음 흙을 조금뿌리고 그 위에 씨를 넣고 잘 다독거려 묻다。이것이 合이다.또 어른께서 봄날에 소가 끄는 쟁기로 밭고랑 켜고 거름 한 다음 곡식 씨앗을 뿌리듯 하시고 괭이로 흙덩어리를 잘게 부서 씨를 묻다. 이게 合이다. 또 밭을 잘갈아 흙을 부드럽게 한다음 호미로 툭툭쳐서 움푹움푹 들어가게 하시곤 참외씨를 넣고 묻다. 또 깊게 묻히지 않아야 할 씨앗은 훌훌뿌리고 갈퀴로 북북 긁어놓다。森羅物類는 生活을 영위하기 위하여 合의 場所를 찾지만 않고ㆍ 合의 장소를 저마다 만들고 있고 共存을 위하여 他居合의 장소도 마련케되는 것이다. 즉 공간 장소상의 合이 여긴가 저긴가 하지만말고 저마다 일궈나가 만들면 된다는 뜻이다. 일궈나가다보면 피치못할 형편이라서 못일구는 자 있더라도 일궈논 자의 여분을 갖고 合居장소를 마련해줄 수 있다는 뜻이다. 天地공간이 이 모두 만들어 생긴 것이지 어디서 떼장을 뚝 떼어오듯해서 있는건 아니다.누가 만들었나를 구차하게 캘 필요가 없다。왜냐하면 그 생긴 이치가 있음으로서니 그 생긴 이치가 만들었다 하면될 것이다。以上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時間合에 대한 空間合의 對應논리 大綱이니 時間合의 內容이 앞서도 말했지만 운명론적이고 尨大한 것이라 쓰지 않기로 한것이다.

◎ 다음은 마음에 새길만한 글이라서 누구의 생각에서 나왔건 논할 것 없이 적어본다。더불어 사는 세상에 끼리끼리나 자기혼자만 향락을 누리겠다는 관념은 버려야 할 것이다。또 어떠한 집단이나 계층 및 혼자만이 뒤떨어졌다는 생각을 버려야지만 격차가 난다는 관념이 소멸되고 갈등의 소지가 줄어들어 세상은 원만하게 궁글르는 사회가 된다 할 것이다。옛말에 권불십년이요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는 말이 있듯이 세상은 세월따라 변하게 마련이지 항상 그렇다고 하는 것은 없는 것이다。양사언의 시처럼 사람이 제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한다고 하지도않고 잘안된다고 부성만 늘어놓으면 해서 될 것도 하지않아서 이룸이 없으리라。易에 말하길 그득실을 근심치말고 막밀어재켜 보란말이 있다。이처럼 사람이 무슨일이던 그냥 어떻게 하다보면 은연중에 그처럼 멀게만 느껴지던 길로 당도해 있으리라해서 얻었으면 이끌어주고 나누어주고 하는 곳 속에서 세상은 잘 돌아가게 되있는 것이다。자기가 어렵게 있었다해서 혼자만의 것은 아닌 것이다。오히려 어렵게 얻은 것이 그 값어치가 돋 보이는 法 여럿에게 고른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것이 그가치를 불리는 方法이라 할 것이다。무엇이 世上에 덕될만한 것을 얻되 자신은 그 얻는 것에 주제자나 主體가 되었다일 뿐이지 많은 救援合과 같은 것들이 있어서 얻어지게 된것이다。그러니 그 구원합들과 사분지 사로 누림을 같이하지 않을 것인가 하는 이런말씀이다 다 같이 하여야만 하는 것이다.救援合의 要旨는 운명을 잘타고나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연·월·일·시가 삶에 적합한때를 선택해야한다는 뜻이고

命에 적합한때를 그럴듯하게 주어맞춰 보고자한 것이 구원合의 논리定立이나 이에 대해선 필자의 허황된 얘기보다 世間에 많이 쏟아져 나와 있는 命理書들을 찾아보면 될 것이다.

◎ 지구의 윤전속도와 맞게 그 안에 실려 있는 삼라는 生息한다。그 生活力을 말할 것 같으면 깊은 밤이면 물소리조차 잠을 잔다하는 거와 같이 삼라가 일정한 휴식을 취한 다음이라야 아침에 해가솟듯 힘이 다시 생기는 것이다。이와 함께 모든 자극받는 것도 함께 일어나게 되니 샘솟는듯한 다방면의 욕망을 억제한다는것은 自然燮理를 거스리겠다는 뜻이니 그러고선 벗어난다 운운하는 것은 도끼로 흐르는 물을 자르겠다는 거와 같다。일정한 간격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그 흐름에 보조를 맞추는 것이 깨치고 깨쳐 벗어나는 지름길 아닌 지름길(즉 正道行)이라 하겠다.

◎ 우주는 살아있는 생명이다。누구든지 살아있는 생명을 부정하거나 벗어난 이는 없을 것이다。中心속으로 파고들면 뻥뚤린 구멍이나 空洞化같은 現象의 次元이 있어 벗어난다할지모르나 이 또한 우주일뿐 달리 뭐라고 지칭할게 없다。담배연기 후 내뿜으면 동그랗게 되듯 동태를 이뤄 멀리 궁글러가 벗어난다할 것이다。그 또한 사라지고 벗어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지 실제에 있어선 우주에 있을 뿐이다。세상에 누가 곧은걸 굽은 것이라하고 굽은걸 곧은것이라 한다면 그런말을 누가 곧이 듣겠는가? 그러나 실재로는 곧은것이 굽은것이고 굽운것이 곧은것인지 누가 우주끝까지 추적해서 증명해 봤는가? 벗어난 끝을 가본자 아무도없는 것이다。누가 만약상 가보았다한다면 그것은 우주끝이 아니라고 둘러되면 그뿐인 것이다. (本文엔) 왜냐하면 우주끝 그것은 없는게 아니라 가는게 불가능이 아니라 바로각자 자신이기때문이다(로 하였다) 네가 뭔가 알기나 하고 줏어섬기는가 한다면 아는 것은 없더라도 저녁에 해지고 아침에 해뜨는 것을 눈이라는게 달려 있어본다 하리로다。不感이나 오랜 시간을 뜻하는 感은 많은 집중적의 소모로 인하여 감각기능의 퇴화를 부르니 굴절현상이 일어난다 느끼는 자만의 現象이 아니라 저촉되는 事物이 여러영향 및 달리 어떻게 되어볼까 하는 힘의 勢(세력은 확장과 응축의 번복이다。이것이 달리 어떻게 될까하는 變化를 부른다는 것임)에 인하여 항상의 位置를 지킬수 없어 變形變化되는 것이니 이러한 變形變化는 굴절현상을 일으키고 이 굴절현상은 곧 휜다는 것은 언젠가는 제위치(움직이는 제위치)를 다시 지나가게 된다는 논리다.空의 현상을 그리는 생김이나 크기나 등의 편차는 일정치않아 삼라가 움직여 자리를 옮기이 따라 움직이게 되니 쉽게 말해 항상 春分點은 항상 제 위치가 아니라 夏至의 位置까지도 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어디까지 假定임) 별(星)을 그리는 圖法則과 같아 삼각뿔을 그리되 한 形體로 똑 떨어지는 삼각도형은 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아무리 정확한 같은꼴의 모양이라도 조그만큼의 편차(흠결)는 있게 되있다는 뜻이다.그래서 삼각형의 원위치를 찾는다는 것이 별모양(다섯 곳을 향한 뿔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이래서 삼라諸形이 있는 지도 모른다。생김이 같음 성격이 같지않은 것이고 성격이 같더라도 씀씀이가 틀리고 使命行爲가 다르고 누적의 위치나 向方의 處해 있음이 다르게 되있는 것이다。삼라가 각기 개성이 다름으로 그 노출되는 現象角도 다르게 되있는 것이다.제 위치로 돈다는 것은 거처가 분명치 않고 어디한곳 일정치 않아 行하는대로 따라움직여 돈다는 논리이니 우주에서 돌아오는 것도 일관성이 없고 일정치 않을 수밖에 더 없는 것이다。다만 자기위치로 돌아온다는 것은 틀림없는 法則과 같을 것이니 이것만은 一定하다 하는 것이다。설령 이번만은 옆으로 그냥 지나갔다 하더라도 다음의 다음에는 등등 언젠가는 화살이 과녁에 가깝게 떨어지다보면 적중할때가 있다는 뜻이다. 나라는 껍질과 本性이라는

世界가 同身으로 있다가 그 옷을 내버려두고 그 本性만 달음박질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옷 벗어는 위치에 돌아와 그 옷을 다시 걸치게된다는 논리인데 그 옷 또한 한곳에 가만히 있는것이 아니고 流動하고 있는 하나의 個體로써 그位置가 아니란 뜻이나 실로 그 位置는 아니나 그 位置와 같게 주변환경이나 그 옷 形이 그렇게 느껴지게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이 또한 생각이 돌은 것이니 예전의 그 옷 걸칠때와는 자못 다른감이 들기도 한다는 것이다。뒷말은 정리때 付言인데 뜻이 서로가 통하는지 모르겠다.

벗어난 곳은 中央만이 아니다。만약상 중앙이 合이라해여 一家見解를 이뤘다면 假見(心相에서 거짓된 허울상을 偶像的으로 지은것)이니 이는 벗어나는게 아니라 삿된 현상(法相=진리라하는 것 왜냐하면 벗어나는 곳은 그것만이라하는 어떤 一定한 假見이 있을수 없기 때문이다。어디一定한 假見(거짓된 견해이나 차용한 象의 견해라 할 수도 있음)이 없기때문에 아무러크소니라 하는 것이다。이랬다 저랬다 줏대가 없어 보이는 곳도 늘상 그렇다면 假見이요 줏대를 세워 立場을 표현하는 것도 가견이다。가견은 벗어남의 노력(방편)은 될지언정 벗어난 것은 아닌 것이다. 무엇을 얻고 잃고 무엇을 찾고 놓아주고 은익하고 하는 것 등등이 전부 가견으로 되어 있을뿐인 것이다.

◎ 事物이 욕망에 의해 모든 行의 發端이 일어난다。욕망이 어디서 오는가? 그렇게하라(삿된 끝의 충돌질 허울고를 쓴것을 벗지 못해 몸부림치는 성격體)는 抵觸(들여받침 또는 자극받는 醒覺體)에서온다 욕망이 움트듯 돋아남을 芽角(솟는 뿔따귀)이라 한다。뿔은 살껍데기를 헤집고 돌을 깨트리듯해서 튀어나온 것이다。그렇게하여 覺이 활짝 피어난것이 제반삼라象인 것이다。사물이 힘이 넘치면 제모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즉 힘이 빠져나갈 구멍 소모시킬곳을 찾는다는게 다른모습으로 변모코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힘(力)이라 하는 것(正意)은 物事에 있어서 그라 일컬을 수 있는 內外在 되어있는 모든것에서 抽出하던가해서 活用이나 適用할 수 있는 것을 힘이라 正意함인 것이다.하다못해 土石 등 그 生命이 없는 것이라고 평소 여기는 것들도 모두 內在되어 있는 性格 및 質量의 勢 있음을 보아 그 힘이라한다。그런것들이 헤집고 돌출하는 것이 角인 것이다。이러한 힘 또한 어디서 왔는가 이 또한 욕망과 마찬가지이나 저으기 다른면도 있을 수 있는 싸고도는 諸般行의 抵觸에 의해서 生成된다 할 것이다。(즉 原泉의 힘은 있겠지만 行에 의해서 內在되어 있는 힘의 有無나 성질을 알수 있다는 뜻이다)왜 싸고도는가?行((흐르는 시간속에서 내라 내세울 수 있는 변화 등의 힘을 갖은 것인데 그것을 무엇(一例로 귀신허깨비)이라곤 지칭할게 적당치않다)) 저가 있음을 저 말뚝같은 사물에다 표하기위함이다。왜 표시를 원하는가?스스로 이렇다하는 (感象이나 如何한의 象이라도) 象을 보이어 修行하는 事物에게 心性에 와 닿는 搖擊을加해(어떠한 사물들이 격돌하면 반드시 표시가 있게 된다) 그제반 고뇌(갈등의 소지)와 병폐를 救援하여벗어남에 도움을 주기위함이며 자기모습(自我化象)도 그에 있어 그와 함께하여 그 어떠한 것이 벗어 치운모습(如來相)이라면 같이 하고자함(現實界의 物事의 感을 갖고 例를 들어 가르킬수 밖에 없는 한계 점에 다달으고 그렇게라도 가르켜야지만 가슴에 와닿는 面이 있음이니 달리 무슨 窮道(궁리해 찾을만한 길)가 없는 것이다。있다면 허황한 함정에 들기 십상인 것이다)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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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역겨우면 먹지도 말아야 脫破(

(罟)를 깨뜨림)이지 혀끝으로 다 맛을 보고 무슨 벗어남(脫破)이할 것인가? 이러한 禁制를 强要하는 듯한 뜻의 말씀이 또한 벗어남을 爲하는 말씀이 아니다。즉 삶을 치사한 면으로만 몰아부쳐 그렇게 여김 먹음 또한 그럴것((깨끗한 마음(걸림없는 마음)에서 깨끗한 걸로對하여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그런 먹음은 뭣하러 먹느냐는 식의 조롱 섞인(비아냥거림) 말씀은 삶의 역경속에 있는 사람을 더욱 궁지로모는 말이지 어떻게 보리道를 펴서 어려움을 벗게 하겠다는 뜻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혹이나 충격요법을 加해 反悖의식을 심어줘 용수철처럼 一躍湧躍케하여

(罟)를 깨뜨려 벗어치우게 하려는 의도에서면 몰라도 말이다. 혹이 말하길 생각이 없어 행동하는 것을 몰라야 벗어남에 가까우리라 한다면 또 그에 대해 반박하길 행동을 모르는데 무슨 벗어남이 있을 것인가해서 계속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듯하면 무엇을 갖고 벗어남이라 할 것인가? 이를 본다면 진정도 없지만 진정한 벗어남은 없는 것인가 한다면 벗어남을 추구한다는게 이 모두 잘못알고 있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그런 번뇌스런 생각을내어 행동을 짓는곳엔 벗어남이 있을 만무니 벗어남은 벗지 않는 곳이 무량으로 존재하여 빈포대 처럼 쌓여 있으니 어느 것하나라도 뒤집어 쓰면 벗어난 것이니 시공의 準則 秩序를 維持코자하는 것에 또 一助의 보살行을 행하고자하는 곳에 있는 것이다. 즉 벗어남(

罟脫破)은 마음을 잘 다스리는 辯才에 있는 것이니 窮求한 理致가 通하는 諸行 및 物事體가 벗어남의 성격을 띄는 것이니 어디 특별히 있는것이 아닌 것이다.즉 우주나 시공이나 삼라 누리와 삶全體가 벗어남의 行象인 것이다.

어떠한 利害得失을 떠난 것이 벗어남인가? 德不德의 所置를 떠난것이 벗어남인가? 만약상 무엇에대하여 관여한다면 무슨 벗어남이 될 것인가? 벗어났더라도 爲하여 관여함인가? 위한다면 누굴 무엇을위한단 말인가? 또 위하는데 무슨 벗어났다함인가? 흐름의 法則((神들을 포함한 귀신 얘기를 여기 쓸필요가 없는데 쓰는 것같아) 無現한게 意志하는 有現한 家로 보이는 여러 差等的 흐름의 行步 즉 時流法則 또는 時間에 의한 一空間活用의 여러 通行法則 等 大意的인 面。이 모든것들이 흐름에 法內에 있다할것임))을 초월해서 어떠한 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그 흐름과 그에 의한 질서를 무시한 것이니 그러고선 무슨 벗어남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질서의 법칙을 존중하여 그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를 넘나드는 능력(능력이라 하는 것은 一切 모두가 神의 司命이니 소위 귀신 농단 집노릇을 하는게 능력행사者로 보이는 것이다)을 설령 갖고 있더라도 벗어난이께서는 行事치 않는 것이다.또 그러한 능력이라는 것조차 알고자하지도 않으리라 處緣한 귀신들이 탈피를 갈구하는 몸부림치는 모습을 내자신의 處緣한 탈파꺼리로 여겨서 같이하겠다면 몰라도 말이다.自他를 애처롭다 同情하는 그런 처연한 뜻을 가르킴이 아니다. 왜냐 동정은 굴레짐(부담)이 되는것이니 일체 벗어남을 추가하는 修行에 방해가 되는 것임으로 금기사항이라 할 것이다) 그 흐름에 맡겨서 해결토록 하는것이니 만약상 초월의 능력을 행사를 즐긴다면 모두 그 질서를 무시하고 의지하리니 세상에 흐름은 괴리되고 森羅는 제위치나 사명을 이탈하고 거둬치우고자할 것이다.그러나 실제에 있어선 질서가 유지되고 있음으로 이는 곧 벗어난 이의 원함(공허의 관점位置)이 아니기 때문이다。왜냐하면 그 흐름의 法則이나 능력행사라하는 것이 진리는 없지만 만약 진리가 있다면 참다운 벗어남이 아니고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모습이기때문이다。앞의 內容 뜻을 약간 뒤틀어서 그러나 또한 벗어난이는 무엇이던간 어떠한 질타를 받더라도 弄斷家가되어 관여하는 것이다.왜냐하면 누가 뭐라하던 벗어난이의 行事를 떳떳하게 할 수있는 理由가 있기 때문이다。理由는 合理性을 띄게하여 만들면 있는 그것이 뭔가? 一切 것((諸 모든 탈파(깨뜨려 벗음)를 갈구하는 것들))과 같이하기 때문이다.先人見으로 와서 닿는 모습은 혐오스럽다는 것은 질곡을 뒤집어씀과 저주의 本體 사탄으로 보이는 것이라도 그 벗어난의 능력행사의 모습이고 잠깐의 향락을 누림을 보임도 또한 그럴만한 理由가 있으니 벗어난이의 恒常한 어느 곳으로 치우치지 않은 行事의 모습인 것이다.(즉 모든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곧 내라하고 끝도 없이 내세우는 시간흐름의 法則의 허망하게 굴르는 자리를 채워서 ((초월이나 능력이란것 이것 또한 삿된 家見眞理편에 속한다할 것임) 을 가지고 시간의 法則을 양옆으로 밀어내듯 밀어낸단말인가? 또는 法相(진리)까지도 代身한다는 뜻인가? 정리때와서 그 뜻이 通하지 않는다)) 그위신을 세워주기 위한(시간을 헛되이 흐르지 않게 한다는 뜻이겠다) 河海같은 度量을 가지신 벗어난이의 능력행사의 모습인 것이다。시간司命은 아무리하여도 곧이곧대로를 原理를 삼음이니 소위 어김없이 궁글러서 벗어난 이의 입장에서지 못한다는 것이다。다만 올해가 있으면 내년이 있듯이 본받아 따라할 줄안다.그래서 시간이라한다 시간이란? 正直을 綱令으로 삼는다。正直이 곧 自己의 本身처럼 되어있기 때문이다.그래서 年年이 좋은 世月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그러나 시간 本身은 司命옷을 벗고 그門(벗어난이)에 들지 못한다. 즉 시간은 그 行에서 이탈치 못해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그러므로 진정한 시간이란 것은 實身相은 나타나지않아 없어보이는 것이며 없는 것이다。다만 그것의 變貌일지도 모르는 공간의 공상들만 時있는 것처럼 生老病死의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무슨 생각에서인지는 몰라도 그 다음 이렇게 적혀 있다) 말하자면 造主란 없다。어떤 독단적인 치켜 세울만한 神은 없다로 작은 글씨로 적혀 있다.

◎ 어떠한 자리(位置)던 자리라 하는 것은 앉아 있는자나 앉고자하는 자들을 그 자리에 연연 집착케하여 속박하는 것이다. 설령 그 자리가 반듯치 않고 기울진 것이라도 유혹하는 價値(앉는 댓가)가 크다면 삼라들은 희생을 치르면서도(즉 수없는 미끄럼을 당하면서도) 어떻게해서든 그자리에 좀 앉아보고자 한다。즉 執着의

(罟)에 매인다는 뜻이며 그래서 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속박은 어찌보면 (차원을 달리하여 생각하면 즉 그 속박이라는 것을 어떤 작은 物事體의 行象(生活象)으로 여겨 관찰하는 이의 안목을 크게하여 照明하듯 한다면) 그에서 활동하는 모습이 그밖에 안되나 하는식의 답답하고 갑갑한 감을 일으키게 한다 할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다시 원위치의 안목으로 돌아와서 생각하되) 그에서 벗어나고자함인 것이다。諸위치라 하는것은 속박하는 것이다.한편으로는 보호받는 안전지대와 같다。안전지대에 있는 物事는 가냘프기(연약함을 뜻함) 십상이다。맑고 깨끗하기는 할지언정 堅強하다곤 할 수 없다 갖은 풍상을 다 겪은 저 언덕받이 枯松은 强忍하다 할 것이다。울에 갇힌 짐승이 있다면 그 또한 벗어나고자 하는 行動性(心)이 없을소냐?((조롱속에 있는 새처럼 안전지대에서 보호받고 있는 것으로여겨 오히려 심상의 평온을 찾은 것이 벗어난 것이라 할 수도 있으니 그 울에서 벗어나고자 않을 수도 있다。그 오래된 습성에 따르는 것이 生活하는데 지장이 없다면 (환경에 의해 대응할려는 능력 변화를 일으키고 變貌進化되는 것이다.그런데 그 환경이 계속 한 律을 지킨다면 굳이 벗어나고자 할 것인가? 도리어 울틀 밖으로 내어놓는 것이 불안한 굴레를 씌우는 것이 된 것이다)) 견문을 넓히고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려면 한 곳만을 굳게 지켜가지곤 얻기 어렵다 할 것이다。백문이 不如一見이라고 실제로 직접 겪지 않곤 풍문만 가지곤 이루기 어렵다는 것이다。그래서 한 곳에서 벗어나고자하는 것이다。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私見 또는 一相의 正見이라면 正見이라 할 수있는 自身이 處한 處地를 잃는(잃어버리고자 하는 생각을 일으킴에서부터다 왜 이러한 생각을 일으키게 되는가? 이는 外部抵觸이 없더라도 그 처지 立場이 一律的이거나 단조로운 면이 있다면(또는 그 反對立場 번잡스럽다던가 어지러움 가득한 속에 있다면) 피로한 마음 쉬고자 하는데서 환멸 권태 실증 등의 거부반응이 형성되어 그에서 탈출코자하는데서부터 處地를 잃는 생각을

하게되는 것이다. 앞서 언덕받이 枯松은 强忍하다했는데 그 强忍에 대한 뜻의 說明이다。이것이 換骨의 말이고 미친머리의 私見에 젖은 말씀이나 강인하다하는 것은 많은 經歷이 豐富하다는 것이다。풍부하다는 것은 무엇이던 收用할 수있는 包容力을 가졌다는 뜻이다。즉 脫破의 언덕에서 無方으로 빛을 발해 그 혜택이 氣와 같아 제누리에 미친다는 뜻이다。말하자면 空化이니(窮極은 없지만 궁극처럼 여겨지는 속에)아무런相 아무런見解 眞理가 없다는 뜻이다。벗어나면 이런 위치에 도달한다는 私見은 정신한 곳에 자리잡아 筆行을 제주장으로이끌려고 꾀이고 있는것이다。그래서 先知覺이 내글(行)을 망친다함이 이래서 하는 말인 것이다.다시 문맥을 枯松설명 以前으로 돌려서 이러한 처지를 잃는 마음생각을 잠재울 수 있는 方法은 그 位置 그 現實的인 立場에 처한 위치를 지키는 것이 원위치 원만한위치 바른위치 언덕해서 의지 할수 있는 위치 다방면으로 돌아다녀봐서 이만함이없다 하는 되돌아온 위치 등)라는 正觀하는 자세를 취할때 가능하다 할것이니 곧 현실입장이 정관이라서 누리가 번복되는 뒤집힘이 없고 宇宙如來象이 存在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필자의 삿된 家見이나…]空이며 空이란 그릇에 담긴 諸宇宙가 收容되어 있다는 뜻이다.그러므로 그것이 나무와 같은 것이라면 오래도록 견실한 성장을 가지고 있게 하기 위하여 말짱한 것처럼 보이는것이더라도 도려내고 가지치기를 하고 酷寒風을 맞는 것같이하고 때로는 북돋아 밟아주고 또 때로는 두둘겨(樞打)鞭達하는 등 諸行(活動)이 있게 되는 것이다。뭣이던 지나친 行은 학대를는 거와 같아 一擧에 多收穫을 얻고자하는 것이나 혹 뜻과 같이 얻을지는 몰라도 그 母體되는 것은 지나친 行으로 인해 급속히 다가오는 老衰함을 견디지못해 곧 쓰러지게 될 것이다。이것이 자기소임을 다한 벗어남인가하는 의문의 꼬리는 계속 남는다 할 것이다。

◎ 道는 自己의 見解와 그行함만에 있는 것은 아니다。道가 높다하여 아랫되다하는 자와 他人의 생각을 잡념이나 망상으로 몰아붙친다면 그 道란 또한 망됨이 아니던가?((이 말씀은 사람 및 삼라物事에 대하여 (항상 刮目相對하는 것처럼 경건하게 對하라는 뜻 또 같은 格의 線上이나 때로는 입장을 바꿔놓는 듯한 생각의 對處를 하라는뜻 등) 우월감을 갖고 게걸찬힘 우왁스런 완력이 좀 있다하여 野視보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그렇다고 진취적인 생각 義勇스런 行爲를 포기하라는 것이나 자신감을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즉 이미 心이 그리로 쏠려 可見이라고 생각이 定理됐다면 이것저것 재는 주저함 없이 저돌적으로 밀어부치는 그런 자신에 찬 행동을 자제하라는 것은 아니다. 설령 그것이 중도에 그릇된줄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勢를 보아서 그만둘 수없는 형편이라면 비겁하게 물러서지말고 그 도막이 마무리되는 곳까지 밀어부치고 보라는 것이다.그렇게해야지만 自他의 心에 뭔가 와닿는 것이 있을 것이다。이것을 뭔가 해낸다는 劤氣라 한다)) 쓸려는 말은 안쓰고 엉뚱한 말만 늘어놓은 것같다。도대체 깨달음이란 基準을 어디에다 뒀단 말인가? 道란 도대체 뭔가? 他人의 行爲나 生覺을 스스로만 못한 어리석은 것만으로 여기는 것이 높은 道요 넓은 道요 깨달음의 극한 限界란 말인가? 또 道라는 것이 무슨 가치나 기준이나 어떻게 定하는 設定이나 분간하는 판단이나 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런것은 줏대 主張 등 家見을 세운 것인데 무슨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方法이며 벗어난 次元의 界란 말인가?((혹이 가르키는 게시판이나 里程標가 있어야지 벗어나기 쉬운것 (목적한 바 도달하기 쉬운것)이라하니 그런것들 모두 한 주장의 家見이 아닌가? 그런 것을 세우지 못하게 한다면 사람의 行할바를 없애고자 하는 것이라 그래서 무엇을 갖고 벗어남의 向方을 삼을 것인가 한다면 그것이 바로 고정관념속의 틀에 박힌

고라는 것이다。저 微物이라하는것들도 爲的(※ 人爲的하는 爲의 뜻°달리 또는 덧붙이기로 지어(作)한다는 뜻)인 里程게시가 없어도 제(自行을 알​아 順行하는 것이다。無爲自然行態가 爲的이라면 爲아닌게 없을것이니 그것을 爲的(※ 爲的인 意味의面은 누가 무엇을 만들었다는 뜻도 포함된다 할 것이다。習貫性도 포함됨)이라하여 물고늘어진다면 물리지 않을게 없어 천태망상이 狂犬에 물리듯 할것이니 달리표시없어도 누리가 爲라 한다면 爲라할 것(※누리전체가 보살 性向이란 뜻일 것이다)인데 굳이 달리 표시해야지만 하겠는가 할 것이다.※이것은 平막대의 중심을 잡고 斜側시킨 것과 같음이라 그 위에 무엇이 乘載해 있다면 미끄러짐이라 오래도록 부지치 못하는 이론으로써 反論의 形成을 자초해 탈파의 말씀 축엔 끼이 지 못한다 할 것이다 자기만 安位를 찾음이 벗어남인가 이것은 自己合理化의 궤변성의 빙자를 이끌어서 비틀어진 심성과 그 행위를 그럴듯하게 美化해서 갈무리고 뻔뻔한 心囊을 뒤집은 듯한 편의로움 편한 자세나 편안한 모습을 보이기 위한 假面의 性格을 띈것에 불과함인 것이다. 아무리 천만년의 참선을 했다한들 가증스런 가면에 불과함이니 수억 겁의 道깨달음을 이룬 벗어났다하는 이도 이 말씀을 거지 발싸게 처럼 생긴 입이 더럽게 내뱉는 말이라하여 일침 놓는다는 뜻에서 시련을 줘 희롱치 않으리라 이는 보는 자가 그렇게 보는 것이 것이지 그 相對體가 그럴리야 있겠는가 하겠냐만은 피차일반이라 그런 모습이니까 그렇게 보일수 밖에 더 있겠는가 하리로다。자기만의 安位를 찾는건 벗어남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