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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대한

투가리 부젓갈 2023. 9. 15. 21:53

 

○ 神의 空間에 대한 適應

神에 있어서 공간이란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즉 공간은 大小나 거리감 方向感 場所感 等은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이 또한 모든 神이 다 그런것은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時間感이 遲速의 差等이 있듯이 差等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神마다 次元의 階梯가 다를 것이니 空間을 超越한 어떠한 神은 그 티끌 같은 작은 空間이라도 큰 고래의 몸집처럼 여길 수도 있어 그에서 가진 役事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또 그 反對立場으로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니 宇宙를 티끌도 아니게 여기리라 즉 空間이란 意味는 神에 있어선 아무런 걸림돌이 되질않아 行事할 꺼리만 있다면 無所障隘히 臨하여 그 일을 주선한다 할 것이다。以上 神의 공간에 대한 적응에 대하여 妄想的인 억측을 해봤다.

◎ 다음은 아무러크소니에 대한 여러가지 尺度를 舉論한 것이니 數多스런 생각이다[아무러크소니]이는 진리도 아니고 무진리도 아니다 또한 진리라°무진리라。해도 상관이 없다。왜? 그저 아무리크소니이기 때문이다.누가 설 곳을 몰라할 때 알려주면 얼마나 고마우랴? 설령 주제넘다하여 (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또한 이렇게 여기는건 제 마음이니까?) 달가워 여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가까이 있는자는 자기의 입장의 道理를 다했다 할 것이다。이 말씀이 진리의 편에 설듯하나 아무리크소니는 아니다。옛 哲人이 말씀하시대 머물곳을 알아 머물면 그자리를 잃지 않는다 하였으니 저 꾀꼬리는 머물곳을 안다하였다。(詩에 보면 꾀꼬리는 幽谷을 나와 언덕받이 喬木의 울창한 잎 속에 몸을 가리우고 아름다운 선률을 낸다 했다°(※ 詩에 대한 뜻。이끌음에서 앞뒤 내용에 필자의 윤색질이 加味되었다 할 것이니 뒷말(美線律)은 순전한 추측일 뿐이다) 즉 어디만큼 어디에 얼마나 이다 이는 事에 處臨한 行에 있으니 그에서 가르침 받아 이 만큼이면 부족하지 않을까? 항상 겸손하고 염려하는 心身가짐을 갖는다면야 조금 病된 면이 혹 있다 하더라도 흐름에 겹쳐 쌓여 흐르듯 절로 治療된다는 것이다。醒者께서도 그 어려움에서 道를 얻듯(그럼 道라는 것이 苦行의 脫만 썼단말인가? 필자의 心相一片에서 또 모순된 점을 지적하듯 또 번잡스런 의문의 波文이 일렁인다) 求道하는 또 다른 或者 있어 또한 그 설곳을 알려주는 者에게 道를 얻고자 하나니(앞의 누가와 모순된 점이 없지 않으나 앞의 누가 또한 항시 그러한 마음이 아니요(흐르기 때문임) 求道하는 마음이 있을런지 누가 알겠는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상관이 없다 때와 장소를 가릴게 없고 是非를 가릴게 없고 둘셋을 상징하는 누수를 가릴게 없고 흑백 번잡이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인가? 병든 용이 비를 내려 적시어 주거나, 썩은 새끼줄이라도 (求道者) 나를 붙들어 주면 구제해준 것이요 썩은 빵 쉰밥이라도 먹어 탈 없으면 나를 건져준 것이요 설령 이런 것들이 병됨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탄과 마귀의 유혹이 아니요 이 醒醉者類일 것이니 짚신처럼 쇠진해서 그러하시리로다 여길뿐이다。힘든 수레가 고개를 오르는데 젊은이는 밀거니와 마음뿐인 어른 丈은 오직이나 하랴? 그 늙어진 것이 사탄이나 저주받은 마귀나 악귀가 行하여 논짓이 아니며 시간의 버림받은 쪽박이 아니며 그 젊은이(새로운 理想 즉 精神을 개벽시킬 수 있는 思想)가 영원한 진리가 아니며 하나님 하늘님 상제님 부처님 등 어떠한 좋은 명분과 뜻 목적이 아니다。다만 그저 그러함일뿐인 것이다。저 長江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친다。새로운 사상과 낡은 사상과의 관계일뿐이니 思想眞理라는 것은 영원치 못하고 (대개는 성숙미달한 한창 자라나는 젊은 소시때처럼 힘이 왕성할땐 初志一貫 주장하는 것은 진리인 것처럼 영원하다 생각한다) 한시대의 풍미를 장식하듯 한때의 정신을 자극시키는 유행과 같을뿐이다.그런데도 사람들은 명분과 뜻 목적 등을 찾아 헤매이며 무언가에 매어달리길 좋아해서 지난 경험을 발판으로 하여 발돋움하고 올 것을 휘어잡듯하여 추종하고 앞으로 달려나아가길 원하는 것이다.이것이 늙은이를 밝고 젊은이에게 매어달려 그힘을 빌려 잘익은 높은 가지의 탐스런 열매를 따고자함이 아니고 뭔가? 그 목적성취를 위해선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게 됨인 것이니 이 글이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격하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다.다만 世態가 人心 씀씀이들이 대개는 그렇다는 것이다。(앞과 문맥이 통할런지 모르지만) 원망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온당치 못하다는 것을 내보이는 것이요 격하시킨다는 것은 스스로가 높지 못하다는 뜻이니 미련한 이가 취할래기요 슬기로운자는 취하지 않으리라 원망한다고 원이 풀리고 격하시킨다고 격하된다는게 생각일뿐이지 현실에 있어서 어디 될법한 일인가? 모름지기 마음의 움직임을 잘 관찰하여 행동이 오른 길로 접어 들게시리 잘 다독거려야 할 것이다(내가 이렇게하면 되고 이렇게하면 안되지…)하고 말이다。

◎ 未知에 대한 어지러운 想念

形容的六合은 모양도 부피도 없는 點과 그의 확대와 또 그이 內面인 것이다。停滯하였어도 그것은 정체함이 아니며 정체한 것처럼 보일뿐 계속 生動하는 것이니 그 生動함도 어느 한방위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염없는 流回(장애가 있는 것처럼 느끼면 틀어돌아 흐른다는 뜻°또 하나의 理由는 꿈틀거려 나아간다는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다)生動 또는 장애가 있더라도 波長의 흐름처럼 뚫고 나가는 貫流無碍生動인 것이다。그 生動速度가 飛虎같더라도 저마다 느끼길 왜 그리 더디고 길게 늘어나 역겁게만 하는가? 한다면 이는 상념의 行步가 빠르고자 하는데서 비롯되는 생각이니 정신이 그리는 흐름은 느리고 心氣는 달리는 듯(부족한듯)해서 조급해져서 그러함이다。時空은 生動(살아있음)하는 것임으로 어디 한 곳을 定하여 縫合하여 마무리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똑 떨어지는 결과가 없다。흡사 그 모양이 멍텅구리 같은 바람개비가 부는 바람에 따라 一定치 않게 돌듯 또 항상 열려있는 門과도 같아 들고 남의 마무리를 모르는 거와 같다할 것이다.(모든게 관념、관점에 있으니 이렇게 볼땐 이렇고 저렇게 볼땐 저렇다는 뜻이다) 다만 그에 의한 內在된 事物들이 결과를 거론한다거나 하는 것이니 그러나 이 또한 실제에 있어선 다음마디로 이어지는 이음새 역할과 같은 것일뿐 결과는 없다。界의 變形은 自我를 寂滅忘却시키는 것이지 결과는 아니다.그러나 저마다 이를 같다 결과로 착각한다.醒者의 界와 醉者의 界와는 다를바 없으나 心相의 角度를 달리하여 들여 밀었을뿐이니 세상과 圓生은 영원한 時空 마무림 없는 六合生動인 것이다。回의 적멸은 自我적멸인 것이니 어찌 善意의 來世觀界일 뿐이랴? 누리界 또는 그 外 表現이다。왜? 回의 적멸이 自我寂滅인가? 이는 실로 回의 적멸이 없음으로서니라。즉 自我가 界를 달리(他界 異界)하여 變形분파 또는 집합 등등으로 환생하는 것이지 回의 六合形容은 영원한 것이다(物的인것만 뜻하는 것이 아니라 事的인것 精神的인거 靈覺的인거 또한 그렇다 할 것이니 영각의 분파는 사람 몸의 신경계통과 다같아 空相一두뇌에서 모두 관찰하고 아는거와 같고 행동도 조정하는 거와 같으니 달아나는 토끼는 몰라도 그리로 가면 함정에 빠진다하여 내달아오는 토끼를 보고 멀찌감치서 길을 막는 조정과 같은 것이니 이런 것이 셈없이 많아 그 時間을 形成하여 삼라 우주가 生動케 되는 것이다。얘기가 엉뚱한 속으로 흘러 原文을 윤색질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 누구(어떤 것 만을)를 가르켜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삼라가 각각 저마다 왕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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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一) 이 限定界도 여러界일 수도 있으며 필자가 설명할 그 全體를 뜻 할 수도 있다。一般은 이와은 十字交差點을 통과한 것으로 관념을 둘수 있으나 그러나 이것이 아니라 全體點이니 點의 擴大속에 自我가 점을 통과한 그밖의 全體와 그 內의 自我全體를 뜻한다。點은 모양이 없는 것에 도달함을 뜻하니 그렇게됨 걸림과 막힘이 없다. 여기서 理論上 內外를 말하나 그 實은 內外가 있을

수 없다. 다음 간단한 圖形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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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二) 이 테는 假象的인 것으로 가로 막는 장애가 아 (圖二)

니다。통과점은 어느 위치에 있던 어딘지 잘모르는 것임으로 굳이 그곳이 어딘가를 알고자 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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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 三) 이것은 통로管을 상징한 圖形 이다 점을 통과한 全體의 界에선 나의 界도 되돌아 볼 수 있으니 보면 들어가 볼 수 있으니 곧 全體의 界에 自我의 界가 있으니 全體의 界와 自我의 界가 무슨 相關(間隔)이 있어 線이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곧 全體의 界는 나의 界도 되는 것이며 나의 界이며 原來 나란 존재치 않음으로 (나를 주장하면 삿된 진리의 길이니 어찌 이것뿐이랴 하는 것을 가르킴이다) 나라는 주장조차 없게 된다.그러므로 삿되지 않으며 삿되지 않나니 삼라가 무애하여 굴레를 벗었으니 脫破 아무러크소니의 경지이다.

宇宙를 支持하고 있는 것을 힘(力)으로 봤을땐 그 힘이 꿰뚫고(貫一) 있는 것 같음인 것이다.오직 그 힘(力)인 것이다。힘(에너지)은 살아있다。漢文의 力字形을 볼진데 회오리치는 듯한 힘의 모습을 그려幹的으로 간단하게 表現하고 있다。(지금 여기서 甲骨 金文이나 篆字의 형태나 그생겨 변천해 내려온 來歷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現實的으로 使用하고 있는 그 字가 어떤 形態를 짓는가의 문제가 重要視될 뿐이다) 力字形象:

〔보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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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회오리치는 힘의 變化된

얼굴로 볼 수 있으니 모양도 부피도 없는 空=點化 點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은 소용돌이는 힘의 모습 그 살아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이런 着想을 어디서 잡았는가(執持를 뜻함)勿論 先覺의 말씀 글에서 얻었다 할 것이다) 그 소용돌이는 어느 곳의 一定行動함이 없는 無限 無爲 有動인 것이다。다만 그에 의해 生成된 物事가 一定함이 있을 뿐이다。이미 一은 圍界秩序의 現象이니 空虛를 관찰함에 있어 이를 미루어 저를 살핀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일런지는 모르지만 그 또한 위계질서가 있다고 假定할 수 있다 것이다.그러나 反하는 것으로 개념을 둔다면 위계부정의 뜻으로도 볼 수 있다.그 次元과 立場을 어떻게 갖는가에 따라서 관찰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空相의 碍 無碍가 決定된다 할 것이니 反하는 立場이 無碍 관점이라면 假定立長은 碍일 것이고 또 서로가 反對立場을 取하거나 이도저도 걸림이 되고 걸림이 아니될 수도 있는 것이니 諸般것이 관찰하는 이의 마음먹기 心에 있는 것이다。秩序에는 哲則이 있으니 强弱(약육강식)이며 그 먹이사슬에 의해 굴레가 形成되며 (설령 무생명의 物體로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세력이 센것한테 세력이 약한 것은 밀리게 되있거나 오그라들게 되있는 것이다.이것이 또한 現宇宙의 관점이지 쭈그러들고 오그라드는 것이 당기는 듯한 힘이 더 센것인지도 그래서 그 反하는 입장을 퍼지게 하는 것인지도 알 수는 없는 것이다.즉 공간을 내어놓고 많이 할애하는 것은 오그라드는 힘이 입장이 더 크고 세어서 그러한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렇게하여 生成된 굴레

고(罟)는 아무리 벗기고 벗겨봤자 뒤집혀지는 현상일뿐 벗어난 건 아니므로 필자의 논리의 초점 또는 要點이라 할 수 있는 것(아무러크소니)에 대한「點」은 門은 될지언정 아무러크소니는 아닌 것이다.즉 힘은 아무러크소니가 아니다。主張을 갖는

고(罟)란 뜻이다.

想想은 妄想을 낳고 妄想이 가득해지면 그것이 旣定事實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고 그러한 여김은 行助의 制約을 가져오고자 한다。音聲 言語로부터 其他感覺行爲나 손짓 발짓의 시작이 겉行動의 始作이다. 다음은 상상의 度가 지나쳐 妄想으로 발전하는 단계의 例이다.

어떠한 時空이나 事物 其他 등등이 常識的인 常理밖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한 능력을 발휘한다면 任意造化한다할 것이다.가령 여러가지 형태의 例로 대단한 압력 미세한 분열 및 분해 측정키 어려운 소용돌이 속도 및 회전 부풀림 확대축소 등 常理를 초월한 作用 등이다。不測作用은 질량(質量)의 變化 形態의 變化 內容의 變化 元素의 變化 등을 가져온다 할 것이다. 보기를 든다면 여기에 어떠한 회전물체가 있다。그것이 보통 一分에 백바퀴를 돈다면 그 物體의 狀態로 보아서 그러한 회전이 대단히 빠르게 회전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영점일초 순간에 억내지 조바퀴를 돌거나 그 以上의 측정키 어려운 상황에 이른다면 任意造化(즉 스스로 自我라는게 形成되어 心性이 어리(凝) 제마음과 뜻대로함)한다는 뜻이다. 즉 상상치 못할 能力이 生成創出된다는 것이다。간단한 능력의 例로 빛을 발한다거나 기리한 음향이나 냄새를 낸다거나 餘他의 빛을 질식시켜 암흑스럽게 한다거나 행동에 장애를 받지 않는다거나 등등으로써 일순간에 千里眼처럼 되고 千里馬처럼 되고 스스로의 몸 및 여타事物을 變換 遁甲시키고 거리의 조정과 시간을 늘이거나 줄이거나 뒷걸음치게 한다거나 공간을 크게 작게 한다거나 우주를 순간에 왕래한다거나 그 순간을 억만년처럼 길게 한다거나 등등 비약적 상황이 일어난다면 이 모든 것들이 임의 조화 능력속의 一片이라

할 것이다。以上의 망상적인 말들이 확연하게 現代文明科學으로 증명할 것을 떠나서 결정코 황당무궤하거나 과대망상만이 아니다라고 사벽스런 생각은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누가 어리석게 질문하길「그것이 일순간에 (영점일초) 바퀴만 돌도라도 타 없어질텐데 그렇게 되면 根源인들 있으랴?」하고 비꼬아 말한다면 필자답하길 그것이 만 바퀴정도로 속도가 느려서 탄것이지 억조바퀴를 돌면 탈여가가 어디 있을 것인가? 할 것이다。어떤 物體의 겉표면이 매끄럽고 윤이나는 것은 그 흐름이 지금도 불측 억조테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라고 삿된 생각은 이끌고 있는 것이다。사람의 관념에 事物이 적당하다하는 능력을 벗어난 行動을 하면 常理에 벗어난 것으로 여김으로 奇異한 現象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한 현상이 昨今에 발견한 어떠한 현상으로써 그 표현 방법 및 수단이 公形式의 符號를 취하거나 명칭 및 用語 一例로 磁氣磁場 等 以外의 그 어떤 未知의 諸式을 갖춘 現象일런지는 알 수는 없다。그러나 그 현상이 앞서의 例와 같은 현상은 아니더라도 그 例와 같은 方式을 취하는 현상이거나 설령 그 방식을 취하지 않는 현상으로써 표현방법이 다른 것일수 있을 것이다。昨今의 뭔가에 대한 측정기준은 사람의 두뇌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이 또한 사람의 두뇌깨임 발달로부터이니 그 以前은 空의 측정일뿐이니 지금의 사람의 한정된 머리를 갖곤 증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설령 考古學者나 地質生成(年代)度를 측정하는 학자들이라 할지라도 그들 또한 사람의 머리를 갖고 있을 뿐이지 어디 귀신의 머리라든가 사람 두뇌의 억천 무량곱의 슬기는 갖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九十二年 五月二十三日 ○時 草案作成을 九七年九月二十日 새벽에 윤색질하여 정리하다)

◎ 진(眞)짜와 가(假)짜와의 관계

진짜가 있어 저가 이렇다함을 내보이면 가짜 또한 그러하다. 곧 진짜라서 영원하다하면 가짜 또한 영원하다한다。왜냐하면 가짜가 없어지면 진짜가 저가 진짜인줄 알 수 없음으로서다 모든 것은 比較에 의해서 저가 그렇다함을 내보이는 것이다. 진짜는 가짜를 이길 수 있으나 사라지지 못하게 하고 (만약상 사라지게 한다면 저의 영원성 추구는 한낱 꿈이요 거품이지 저 또한 겨룰 상대가 없어진 것임으로 해이해지고 맥풀려 自然도태되고 말 것이다) 가짜는 진짜를 이기지 못하나 능히 진짜를 떠받쳐 주는 것 같은 자기역할을 다하여(이를 진짜를 감당한다한다) 영원히 없어지지 않느니라 또 없어지는 것 같이 보이더라도 어딘가에서(진짜라해도 상관없다) 破生分裂되어 나와 그 位置를 지키게 되는 것이다。아니면 眞假는 힘에 의해서 결정지어지는 것이니 또 힘에 의해서 뒤바뀌어지는 것도 있을 것이니 원래부터 꼭 그렇다는 결정된 眞假(참깨나 들깨=이것들은 저마다 特異한 個性이 있는 것으로 저 自體性分으론 眞이라 한다)가 없는 것도 있을 수 있다 할 것임) 마치 빛과 암흑 선악 강약 음양과도 같다할 것이다。혹이 말하길 어떤이가 眞理라서 그를 다 포함한 것이라면 그 논리가 어리석기 그지 없다 할 것이니 왜냐하면「나는「그 아니오」」가 있기 때문이다.즉 거짓진리가 진리를 입증해주기 위하여 거짓 진리로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거짓 진리라 하는 것도 하나의 相으로써 一家見의 眞理인 것이다。(세상이 굳이 자기주장만으로 이룩됐다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注知시키고자 하는 것은 삿된귀신이 허황된 제居處의 塔을 쌓게 하고자 하는 거와 같은 것이다. 일체의 저의 추종하는 理想만이라는 我執과 같은 主張이 이 삿된 鬼神이 시켜서 하는 것이니 마치 두뇌 속을 제집하여 想念의 또아리 몸을 해갖고 혀를 날름거리는 大莽(큰구렁이 뱀)이 시키는대로 따라하는 것처럼 괴리역할 노릇을 하는 것과 같음인 것이다。一切(그렇게 여기게 하는것) 것이 삿된끝(邪端=邪誕)이라서 어느 한가지도 옳은 主張이라는게 없는 것이다。지혜로 함정을 파고 모든 걸려드는 것을 포로로하여 노복을 삼고자 하는 것들이 삿된주장을 펴는 귀신 상념들로써 이 또한 實力이 있어야 하고 能力이 있어야 한다하나 고집불통의 순수한 匹夫의 마음은 순순히 감복시켜 빼앗지 못할 것이다。강압적인 힘에 눌려 제압 당하는 것은 강제로 수탈 당하는 것이지 좋아서 감복하는 건 드물리라。꾀이는 甘言이나 주위의 에워싼 조성된 빛이나 여건이 心氣를 흥분상태로 몰거나 최면에 걸리듯 하게 함도 (심기에 대한 여러면으로의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게 하여 저들이 추구하는 목적달성에 利用코자함) 이 또한 하나의 야비한 수단으로써 순수한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볼 수없는 것이니 진정이란 뜻도 없지만(진정이란 말이 진정이지 실제에 있어선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할 것이다.왜냐하면 참뜻이란 것은 사벽스런 情의 감투 허울이지 그없기 때문이다.) 만약상 진정이 있다면 진정으로 剛剛한 匹夫의 마음을 감복시켰다곤 볼 수없는 것이다. 진정한 감복은 이것저것 재는 깊은 생각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이니 삿된 생각의 싹을 심대가 여물기전에 짜를 만한 하여논 功積이 있다면야 어느 정도 수긍이가서 고개를 끄덕거려 줄 것이나 남의 몸에 새끼치고자 하는 곤충처럼 알 속은 다 파내치우던가 먹어치우던가 하고 제집 제허물이나 제새끼먹이나 허물집을 하겠다면야? 누가 그새끼 기르라고 정신세계의 몸을 순순히 거져내놓겠는가 이말이다。그 空虛의 內面을 훤히 안다하는 如何間의 그 主張이라 하는 것과 것들을 무간지옥 같은데 가두워 옴싹달싹도 못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한결같은 목표이다. 주제넘게도 내라 하는 모든 것들이 진리의 편에 서길 좋아하니 어리석게도 하나만을 좋아하고 그 하나를 나누어 부릴 줄 모르고 하나에 하나로 묶여 부림당하느니라。

위대하다 가짜여! 능멸 당해 그 勢를 얻을제엔 내가 이런줄 모르느냐는 뜻의 엄한 훈계의 패배의식이나 격고의 痛恨과 그 질곡行을 베풀고 공경받아 그 勢를 갈무릴제엔 (즉 내게 승리나 자긍심이나 實利나기쁨을 안겨줄 때) 겸허한 그 자세(가 있다면) 능히 없수히 여기지 못하리라.

위대하다! 가짜여! 진짜라는 것을 이기진 못하나(진짜라는 것을 왜 이기지 못하는가? 그것은 이기면 진짜로 되는 것이지、가짜가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즉 실력 없음.새로운 혁명세력에 의해 부패하고 구태의연한 前王朝가 魔나 假가 되어 무너지는 거와 같다는 것이다) 능히 감당을 하나니 가짜는 無量이라그 數量이란 뜻조차 모르나니라.내라하는 저 넓은 반석을 솔솔부는 바람이 티끌뭉게와 어우러져 쓰다듬고 쓰다듬고 가냘픈 저 풀잎위에 맺힌 이슬 동그르 옥구슬처럼 맺혀 그저 사랑스럽기만 하다하나 이 또한 한 때일뿐 그 歲月 지나면 無常이라 파이고 깎여(내라함이 變貌하듯) 이슬 또한 해가 뜨면 사라지니 오히려 우기지 않는 가짜만도 못하다 하리로다。그 진짜 하나를 가짜 둘이면 감당할게 있고 셋이면 넷이면 당할 것 있고 열이면 千萬이면 當할 것 있으니 어찌 개살구가 토종살구인데 流入外來種 洋살구만 못할까이 다。나에 이 글을 쓰레기 글처럼 여기듯 개살구라 천박시하고 제대로 거름한번 주어봤나 북돋음 한 번 해봤나 恨 맺힌 時流 얼과 얼들이 사납게 내라하는 흉년을 만들어 위세를 떨칠대 허기진배 요기나 시켜 주고 뭇짐승과 나누어 먹으라한 줄 모르고 말이다. 토종 살구도 거름만 잘하니 달기만 하더라 잘 손질하고 交配 잘시키면 두 주먹 보다 더 커지니 배운이의 유전공학같은 지식 종삼은 것은 어디다 쓸려고 그러는가? 도리혀 저들 저 귀신에게 종될려고 종삼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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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변화이며 생명이다

시간이 있다고 알리는 것이 곧 時間이다。시간이 무엇을 갖고 그 있음을 알리는가? 그것은 곧 變化이다. 변화를 일으키는 能力이야말로 그 存在를 알리는 적절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시간은 살아움직이는 흐름이다。生動함이 없으면 그 시간이란 존재나 그 가치를 모르고 그 존재를 모르면 그를 거론할 수가 없으니 설령 시간이 있다 한다 하더라도 상상次元理論전개와 같아 有名無實하리라。그러므로 시간은 自生動力을 갖고 있음으로 變化하게 되고 變化한다는 것은 生活形態를 말하는 것이니 自能力 變化에 의해서 그態度가 形成된다 할 것이다。그러므로 또한 時間은 自生命力이 있는 것이다.

○ 반복하는 가운데 머리는 열린다

한말(旣以行言)을 또 하는것 같지만 이쪽과 저쪽이 시간差(시간의 개념)가 나면 그 間에 마찰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앞서 밝혔듯이 그에서 또한 附隨的인 것이 발생하거나 創出된다。그것이 혹 빛이거나 암흑이거나 如他이거나는 굳이 알고자 할 필요가 없다。왜 그 분야에 대해서 전문적인 연구는 여러 사람이나 學者들이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남이 이미 생각하고 말하고 발전 발명한 것을 내가 말한다고 말이 아니라곤 할 수없는 것이니 말은 하여야만이 되고 고기는 씹어야 맛이라고 자꾸만 번복하는 가운데 머리는 깨이고 숙달되어 밝게 열린다 할 것이다.(※ 리상 괴리 갈등현상 新思考의 相을 創出하게 된다는뜻)

제허물도 건전치 못하면서 주제넘게 바르고 健全한 생각을 가지라는 他를 제도하겠다는 그래서 이렇게 허리를 펴 큰 것처럼 보이겠다는 망녕된 정신의 가르침이다.소위 제탈은 거름 지겔 질망정 저는 帝王하겠다하니 그 비틀거리고 일그럭 꺼리는 꼬락서니가 툭툭 불궈나는 몰골에다 온갖 어지러운 짚북덕이를 뒤집어 쓴 봉두난발에 다 누덕누덕기운 덮개덮개걸친옷 千年동안 물에 한번 가 보지 못해 물구경한지는 오래이라서 온갖 부스럼병을 갖다부친거와 같다할 것이다. 그러면서 썩은 입에서 한다는 소리가 뭔가 득도한냥 주어 섬기는데 무슨 생각을 정리할때는 끝까지해야지 중도에서 그를 비판하는 것을 떠올린다면 아무것도 한길의 줏대를 세우는 글은 없다하고 이렇게 쓸말은 아니하고 엉뚱한 말을 늘어놓는 것 또한 삿된 생각이 그 길을 막고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 쓰고자 한말을 써보기로 하는데 모두가 건전한 생각을 갖게되면 그런 사람들마다 하는 일이 잘 풀리고 좋은 方面으로 成事된다면 그들의 몸담고 있는 집단인 사회나 국가는 변영을 누릴 것이다.이러한 건전한 생각을 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운명이다 즉 건전한 생각을 들게 하는 것도 운명이요 하는 일의 쉬운 성사도 운명이다.이 모두가 운명이니 운명을 잘 만나고 볼 것이다。첫째는 世態환경이요(따지고 보면 이것도 타고난 운명을 가진 인간 및 諸物들이 조성해 나가는 것이다) 둘째도 운명이요 셋째또한 운명이다.운명의 개척에 있어서는 他와 경쟁하여 지지말아야 한다. 만약 질쪄 패배의식이 만연하면 의기소침해져서 아무것도 능동적으로 할 수 없다。저 저돌적으로 움직이는 자가 功名이 있는 것이다. 그 장애물을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제거해 놓고 우뚝히 올라서고 볼 일이다. 승리해서 번영을 누릴려고 국가간엔 전쟁을 하고 (뜻이 좋다면 大타협이나 군비 경쟁 잘살기 경제경쟁 등 피흘리는 전쟁 아닌 전쟁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끼린 주먹다짐하고 힘이 부친 자는 꾀를 써서 함정을 판다 우선 이겨놓고봐야 帝王하는 것이다.모든 주위는 제왕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그 길에 나서라 자주 내몰리다 보면 어느샌가 전에 목적하던 바가 되있고 새로운 길로 달려나갈려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을 것이다.주저해서 부끄러워 뒤로 숨을 게 아니라 용기백배하여 앞으로 나서 바보짓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그리고 야유나 놀림의 바라봄을 두려워말고 치켜 세워주는 발판으로 여기라 바보짓도 자꾸하다 보면 이력이 나는 法 어느샌가 정상적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길가에 과일 행상처럼 처음시작할때는 용기없어 소리치지 못하고 얼마에 몇개 팻말을 써 세우는 것도 한 방식이다. 손님이 오면 보살이라 대화하는 중에 말문이 터져 자연스럽게 소리치게 되는 것이다。이것은 순전히 노년 가까이 오는 李아무에게 하는 말과 같음이라 삿된정신이 제노력은 아니하고 이렇게 주절거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흡족하게 되면 온갖게 저를 위하여 있는 것같고 절로 제왕의 자리에 있게 되는 것이다.이제 그 세상 부러울게없다하고 쌓여온다면 누구나 제왕처럼 될 것이다.

◎ 늘 (恒常)에 대하여

늘이란 무엇인가? 처음이나 太初를 擧論하는 것은 마지막이나 끝냄(終末)을 거론하고자 함인 것이니

늘이란 뜻과 相反된 다 할 것이다。늘 언제나란 것은 變化가 없어 단조로울 것 같으나 內在되어 있는 것의 융통이나 活盛作用에 의해서 여러가지 變化現象이 인다할 것이다。즉 이 李我某가 거론코자 하는 要旨는 세상 온누리의 成立을 뜻하는 時空間을 누가 太初에 만들었다는 것만 아니라 늘상 그러한 늘이란 뜻 空이란 뜻이다.그러므로 늘이란 뜻은 영원不變性이나 哲則을 띄고 있어 끝을 볼 수없다는 뜻이다。즉 世上은 空限象 永遠하다 단지 그속에 있는 것들이 終始가 있다 하나 이 또한 世上이 大生命으로 영원히 活動하고 있다는 표현 작용에 불과할 뿐인 것이다。즉 大生命은 늘 인것이다。永遠히란 뜻과 말 또한 늘이 아니다.長短을 論하는 槪念이 드는 것은 늘이 아니다。遠近生覺 想念이드는 一切것이 늘이 아니므로 말을 하려니까 영원한 것이 늘이라 하는 것이지 잣대로 재는 意味를 內在해 갖고 있는 뜻의 一切것은 늘이 아닌 것이다。그렇다면 여기서 또 늘이란 말과 뜻을 갖고 줏대를 세운 것이니 줏대를 세운 것은 삿된

고로써 언젠가는 허물어진다 하였음으로 늘이란 뜻 또한 無方의 立場을 갖게 하는 空과는 거리가 멀고 사벽스런 진리라하는 편에 서 있는 變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실제에 있어선 變하는 흐름이 아닌가 한다。(이는 손에 쥘※ 수 없는 것 같아도 그 內在되어 있는 變을 갖고 손에 쥘 수 있는 감이 와 닿게 된다할 것이다) 이렇게 사벽스런 또하나의 생각이 의문을 제기하고 反論의 가로 널판지를 갖고 물꼬를 싹 가로막듯 하고 물을 흐르지 못하게 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흐르는 물이 많다면 넘쳐 흐르는 것은 明若觀火한일 아무리 그것이 자기 복안에 안맞는 다하여 그릇되다고 우기고 훼방을 놓고 가로 막더라도 空이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은 맑은 물은 흐르는 것이다。內在되어 있는 삼라物事의 終始 등 兩分化法則은 界의 變化에 불과할뿐 界가 없어지는건 아니다。늘은 亡하지 않고 興하지 않아 아무러크소니는 病되다 탈잡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늘이란 것이 一存

고의 一片의 몸일 것이니 그 굴레를 벗지 못해 몸부림치는 처연한 모습이

지 아무러크소니는 아닌 것이다。늘은 과거와 미래를 가르키는 시간감이 없는 것이라서 늘인가? 늘상 계절의 변화와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시간감이 있어서 늘상 굴름이 그러하다해서 늘이라 하는가? 도시 줏대가 없어 걸림이 없어 종잡을 수 없는것이 늘인가? 의문의 번뇌는 구름처럼 들고 일어난다.

◎ 空亡은 時間的인 개념인가?

사람의 힘이 위대하여 人爲的으로 事物的 空亡을 없애는데 힘써 노력하니 곧 이층 삼층 등의 쌓아올림과 立體交叉路를 만듦이 그것이다。이로써 事物的 天中殺을 없애고자 함이니 그 슬기로운 일이야말로 神靈스런 思考에 바탕을 둔 覺醒에서 비롯됐다할 것이다。혹자는 이것을 森羅萬物의 本性과는 다른 異性에 의함이라 한다。각성이든 이성이든 여기의 論調로선 시시비비를 가릴건 없다。아무튼 生活을 하기 위해선 各苦의 시련을 딛고 어떠한 장애는 헤치고서라도 목적달성에 매진함인 것이다.

이것이 그 사람의 삶에 多方面으로서의 活力이 되고 용기를 불어넣는 자신감이 되고 나아가선 환희를 맛보게 하는 것이 됨이니 이로써 空亡은 없다。그 實象은 空亡은 生命줄과도 같은 것이니 空亡이 없다면 시간도 없고 생명도 存在치 않는다 할 것이다。(差等=어긋남에 의해서 삼라가 있게 되는 것이다.空亡은 時空의 어긋남을 말하는 것으로써 그 어긋난 부분을 作用에 反作用과 같은 오고자 앞서 줄 서있는 空들을 미리 끌어다 메꾸고자 함에 있어서 諸空現相(色等感象이나 여러界象)이 이는 (興起) 것이다。) 또한 공망이 없다면 意欲도 없다. 사물적 공망을 없애고자 함이 곧 삶의 空亡을 없애고자 함이니 어찌 자기 짝을 찾지 못하겠으며 求하지 못하겠으며 만들지 못하겠는가? 하다못해 짚신켤레도 제짝이 있다한다。북산우공처럼 극복하고 자하는 것엔 협조할 것이 自體的으로 生成되어 不可能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다。능히 부리고자 求하는 곳엔 아니 쫓을 재간 없으니 당기면 와 닿는게 당연한 理致다。

未來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공망줄에다 生活이란 날씨(緯)를 놓아 공간을 엮어 제짝을 찾으니 흡사 방적공장의 직조기에서 원단짜여 흘러나오는 것 같으리니 어디空亡의 흠결이 있을 것인가? 거기 사람이 있어 한눈을 팔거나 잔꾀를 부린다면야 스스로가 거부하여 그 비단폭에 흠결을 만든 것이니 그러고도 공망 있음을 한탄할 것인가? 以上의 논조가 일편의 줏대를 세우는 삿된 진리인 것 같으니 나는 그리따라 아니하련다 하고 망가트린다면야 벗어난 것이니 별수없이 別界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아무리크소니라고는할 수 없다。또 그것이 아니라고도 부정도 하고 싶지 않다.

시간에 대한 空亡을 만듦은 歷史란 연을 맛바람을 받아 저 푸른창공에 두둥실 띄우고 줄을 잡아 당기며 초원을 달려가는 아이와 같다 즉 공망은 잡아끄는 삶의 생명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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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圖形) 이것은 空의 형성圖形一片이다)空을 形成하여 시간은 흐른다。시간은 온갖

것이 제 것이라고 희롱코자한다。희롱받고자 아니함이 저 돌부처인가? 변함이 없이 흐르는 綠水인가? 무엇인가 얻어 벗어난 것은 삿된 진리라 자루를 뒤집어 쓴것이지만 놓아(放溢=내버림) 벗어난 것은 그냥 그대로이니 저 풀 저 흙 저대로 이대로 그대로라 하는 것들이니 아무러크소니에 가까우리라. 혹이 말하길 無氣力하고 맥풀린 것 같다하니 아무러크소니는 아닐 것이다。 시간이 (무슨 空象을 띄던간) 맴돌다 간자리엔 허무만 감도니 너 그자리에 가지마라 가면 서리맞아 시든 황국처럼 슬프게 느껴지리라 하리니 以往之事는 덮어놓고 제쳐놓고 未知의 世界를 찾아 앞으로 앞으로

달리는 草園을 달리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그러나 空이 空의 內面을 보는 것 같아 회상의 추억은 떨칠수없어 슬픔이 베어있는 물기젖은 눈동자와 같다 할 것이다.

空中은 空亡이 없다. 세상에 또 空亡한 가운데 空亡이 있겠느냐? (이 말씀이 또 무슨 말씀인가? 빈속이 빈것은 빈것이 아니란 뜻이다.생각해봐라 빈게 비었으니 빈것이 아닐수 밖에…) 이를 가르키기 위해서 푸른 하늘이 저렇게 펼쳐져 있지 않느냐? 어떤이가 말하길 그 뜻은 막힌 가운데 또 장애가 있다는 뜻이니 雪上加霜이로다 함에 내가 반박하길 공중은 空亡이 없고 생명을 용솟음치게 하는 힘을 얻게 함이니어찌 錦上添花가 아니냐? 한번 빠진곳엔 두번째 발을 디뎌놓는 것은 얻을게 있어 얻고자함이니 반드시 얻으리라 하였다.어디 지켜서 두고볼 일이다. 정말 그런가? 아닌가? 하고…

시간만 남아 있는 그 時的인 自體 테두리내에서의 (범위내에서의) 공망은 없다。즉 교차로에서의 다음신호를 기다리기 위하여서 서 있는 자동차自體는 활동영역이 잠시 잠깐 금제되어 운신폭이 그 안에 국한되어 있어서이지 없어진건 아니다。그 안의 사람이면 잠깐 쉬면서 갈 준비를 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으면그 흐름을 볼진대 언제까지고 붙잡아 매어두진 않을 것이다。이런걸 본다면 시간은 흐르는데 공간없어 진행치 못한다는 것도 잠깐일 뿐이다。이는 왜인가? 그 잠깐의 흐름이 실은 저쪽의 공간과 짝하여 주기때문이다.혹은 같은 공간을 쓰되 시간이 이쪽을 해 주었다 저쪽 空象들을 짝해주었다 하는 것이라해도될 것이다.

時間은 움직이는 身을 가진 巨大한 힘、諸象을 戱弄한다. 모든 것은 時間의 엮음이다。왜 그리 그럴까? 그 시간이란 것이 醒覺體인가? 사벽스럼으로 몰아가는 邪誕인가? 아님 뜻이라 하는 神像인가?

(여기서 다음 말을 引用하는 것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兵家는 말하기를 戰爭은 남의 나라 땅에서 하는게 유리하다한다。그 나라 백성과 위정자들을 교묘한 間(細作=諜報=情報=間諜)者 戰術로써 서로 헐뜯게하여 우환속에 들게해서 피를 말리고 도와주는체 한다면 설령 그런 사실을 눈치챈다하더라도 어느 겨를 내게 원망의 화살을 돌리랴 도리어 도와주는걸 감지덕지하지 하게시리한다한다。舊債를 新債로 갚으면 ((묶은빚=먼저의 桎梏을 풀어줬다는 지배력 新빚=앞支配力의 횡포를 평정해줬다는 後支配力 묶은빚 빚이 모두 저(神이라하는 사탄인가? 의문점이다)가 二元化 시킨 저가 우리(순박한 세상어지러움을 염두에 두지않고 묵묵히 삶을 사는 그런 類…)를 利用코자 일으킨 책략에 의해 생긴것이나 이 또한 간교한 여우같은 제능력이라 한다)) 신채는 그 불어나는 利子는 무엇으로 갚나…그 나라 백성이 세멸토록 노복이 되리로다(그리 안되기 위하여 저항세력이 싹트는 것이다) 이제 내 그 어느 나라 백성이 종되는 과정을 보리로다。이렇게 때로는 먼지나고 때로는 질컥하고 때로는 차가 쉼없이 쌩쌩거리고 달리는 큰길가에 위험천만하게 나서서 아무대나되고 삿대질하며 미친이 중얼거리듯 하는데 시간의 희롱에 장단을 친다면 참으로 그나라 백성(아무나라 백성이라해도 상관없으니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類들을 통틀어 백성이라 칭한 것이다)의 根性이 덜떨어졌는가 의심하리로다。대체로 축복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이며 그런 甘言의 땅과 백성이 어디이며 누구인가? 시간의 희롱속에 광란의 회오리 강도는 점점 度를 더하여 갈뿐이다。깊어가는 밤 샐줄 모르는 밤처럼 말이다.그것이 이 시대 文明이고 文化인가? 네가 어느 각도로 재어서 앞과 같은 꽈배기 줄같은 궤변논리를 전개하느냐 한다면 미친 자의 얼비친 생각을 주어섬김이라 하리로다。그렇게 짚히고 쏠리고 들리고 기울고 하는 것은 뇌파를 그물코 흔들듯 자극시키는 神줄이 하는 것이다. 즉 삿된 진리 귀신줄이 지나친 비약적 억측관념 적중하면 예측관념(총명한 靈感力이라하는)이 되는 妄想을 짓는 것이다.

일체의 神이라 하는 것은 모두 鬼質의 힘(즉 귀질에 언덕 依持한다。이것은 物事的인 性格을 띈다)을 얻지 못하면 그 힘을 발휘치 못하니 그러므로써 이 싸잡아서 귀신이라하며 귀신 짓거리라 한다。一切 것을 제가 만들었다는 것이 망녕된 神이라하는 것이니 鬼도 저로 부터이며 제가 타고가는 蒼海(蒼空)의 一葉片舟라 한다。그 또한 미친귀신의 妄想에 의한 망녕된 作態라 설령 제가 지었다하더라도 제 아니지은(作)걸로내 팽개쳤다가 어떤이가 火田일궈 개간해서 곡식좀 내먹으려 하니까 제 땅이라고 찾듯 고임(떠받듬)받기 위해서 때 맞춰 제가지은 것이라 우긴들 이미 제지은 意味가 퇴색되었는데 어찌 제지은 것인줄 諸象이 알아줄 것인가? 더럽고 치사하다하여 개중엔 도로 너 가져라 하는 자도있을 것이고(이는 저 사상에 물이들어 저 백성이나 노복이 되어 간다는 뜻이다) 아니ᆢ못준다 수백년을 우리가 이미터하여 살았는데 이미 이 터전이 우리에게 同化되었고 우리습성이 모두 베어 있으니 우리가 소유권이 있다。남의 터전을 살맛나게 보이니까 너가 빼앗으려 하느냐하고 버티는자도 있을 것이다。이래서 세상의 諸理念 思想 主義가 어지럽게 되어 원통함을 풀지 못한 원한의 想念神이 저주몸(思想身)을 갖고 환생하여 궤리적인 理想을 合理的인實相인 것처럼여겨 諸森羅를 상대하여 설법하듯해서 포섭 전파 걸려드는 자들을 더욱 쇠뇌시켜 수족같이 만들어 실제로 實行에 옮기고자함에 수많은 어지러움의 事(갖은 명분의 수많은 전쟁과 그 殺傷 病 재난 천재지변 등과 달콤하게 느껴지는 향락행태=이 또한 病들어 가는 것이다)가 일어나는 것이다。제지음(作)이라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제지음 아닌 것 걸 제지음이라 어거지 씀이랴? 두말할나위 있으랴 말할게 없는 것이다.※ 이것이 시간이란 의미와 무슨 관련있는가? 시간이 상념신의 몸이되어 하는 헤짓거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힘(力)이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화산(火山)분출을 볼진데 땅속의 불덩이인 마그마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活動이 甚化되면 단단치 못한 땅거죽 압력이 약한곳을 찾아 화산은 분출한다한다。江水가 두껍게 얼어도 숨구멍은 있다。억제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은 돌파구를 찾아 그 힘을 분출 소모코자 한다. 숨통을터야「내가 이러하다는」그 있음을 내 보이고 그 生命을 扶持할 수 있기 때문이다。숨구멍 대체 그곳은 어디며 왜 그런곳이 있어야만하는가? 두번말할 것없이 힘 있음. 主張하기 위해서인 것이다。그런곳은 너무 強하면 부러지는곳 氣質이 부드러운곳 兩端임인 것이다.堅剛하면 융통이 없어 부러지게 되는 것이고 유연하면 엷은것이니 잘넘어가고 말을 잘듣게 된다.그래서 지나친 剛柔는 이도저도 모두다 힘의 숨통이 되는 것이다。만약에 힘이란 것이 心鏡(情)을 가진 사람과 같다면 힘은 그러한 剛柔 長短點을 잘 利用하여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처럼 스스로 즐겨가며 그 힘의 資源이 될만한 質根源泉의 事(性覺이 그리는 (圖)想念 理想主義 精神感情 및 평소의 諸般行事)物을 有效適切하게 消耗시켜서 生命을 維持시킨다 할 것이다. 힘은 時空에 의한 모든 것이며 모든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世上宇宙는 이것으로 되어있으니 그중 人間의 두뇌에서 生成되는 갖은 理念과 思想 및 主義主張에 의한 갈등의 증폭은 競爭을 가져오고 그 경쟁은 힘을 消耗하는 분출터가 되고 그 噴出터는 바로 힘의 전장(싸움마당)이 되는 것이다. 즉 힘은 제반物事를 제희롱감으로 삼는 것이다。힘은 힘 저 自體가 그 뜻이 손상되거나 不美한 곳으로 方向이 설정되어 타격을 받을 곳엔 「내라」하고 나서지 않는다.그리곤 그런것은 善한 意味의 能力이라 아니하고 邪魔라고 여기게 하는 것이다。힘은 諸象을 힘의 消耗品으로 여김이니 諸象의 感情을 제(自)감정으로 여기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니 제상의 희노애락이 또한 그러해서 힘 저의 뜻대로이니 諸象이 使用陶具이기도하고 거치장스러울땐 쓰레기처럼 내버리기도 하는 그런것으로도 여김인 것이다。힘은 어디서 왔는가?

逆說的이나 그 眞價를 認證받는데서부터 역할이 부여된데서부터도 힘의 有無가 成立된다할 것이다.그 以前에는 그것이 힘인지 뭔지 念頭에 介意한게 아니므로 存在與否가 不確實하다 할 것이다。힘의 얼굴은 뭔가? 시간의 힘이 위대하여 다스림의 근본으로써 歷史를 이루고 공간의 힘이 위대하여 시간에 의한 氣어림(凝)으로 인한 變化모습 놀이터 森羅를 이루고 性의 힘이 偉大하여 위계와 질서를 이룬다。힘은 현재 현실의 위치에서 생겨나고 형성됐지 그 前에 누가 만들었고 以後에 누가 만들지 않는다。힘은 과거와 미래에 生成되지 않았고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따라서 太初가 없고 종말이 없다。恒常 즉 늘 언제나가 힘의 얼굴인 것이다。다만 未來에 어떻게 할 것이다하는 가상은 할 수있다.또한 과거에 힘이 있었다면 어떠했을 것이다.또는 當時 어떠했다하는 추측은 할수 있을 것이다。힘이 과거 미래에 생성되지 않았다 하고선 뒷말을 付言하는 것은 불확실성을 말하는 것이니 뜻이 통치 않는 모순투성이 글 內容이란 뜻이다. 힘은 表現相이다. 시간의 힘이 아무리 위대하다 하더라도 공간에다 空相으로 표현치 않고선 그 힘이란 것을 알 수 없는 것이다。저 기둥은 지탱하고 있음으로 인해서 힘있음을 인정받고 저 시간은 무르익게함으로 인해서 힘있음을 인정받고 저 物은 그 性質과 價勢를 발휘함으로 임해서 힘있음을 인정받아 그 生成을 注知시킨다。

힘은「늘」로 존재한다. 힘은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힘은 信仰의 體가되어 사람을 포섭 일을 하기위하여 철면사상을 쇠뇌시켜 武裝시키곤 어지러운 世波路로 내어몬다。지나치면서 스치듯 하는 생각 그 사람이 어떠한지 알 수 없다。남을 경시치 말라는 생각이 얼핏스친다。처음보는 사람이 어떻게 나올런지 알 수 없으면서 상대한다는건 어려운 일이다。철부지 아이는 멋도몰라 시키는대로 그렇게 한다고 치지만 이치저치아는 저처자 그길에 내몰렸으니 오직 믿음 하나에만 모든걸 내맡긴듯한 저태도 수줍음이 역역하 한가롭고 유여한 나의태도 부담이 없으니 그 또한 부담없는 행동과 말만던지고 강에노는 물고기 먹이 지나치듯 하고간다 요런모양으로 내게 접근하니 (나는 모두를 통틀어 나라하는 것이니 일체것이 空相이니 나 아닌자는 他相이니 空 및 他하는 것은 진리없기 때문인것이니 쭉정이 알멩이 거론할게 아니라 모두 내팽겨치라는 뜻이다) 이것이 포섭하는 길의 한가지 유혹에 속한다 할 것이다.그저 그렇게 시키는 젖은( 물들어 있다는 뜻)머리가 야속할뿐이로다。아무튼 ××神使命이 內面이 들여다 보이는 것같아 꼬락서니하곤 샛눈으로보여 탐탁찮은데 어찌한담 왜 나의 심신이 바르지못해 꼬고 있음으로 사벽된 심신인줄 왜그런지 나도 모르므로서니라。

◎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개중엔 간교함을 터득한다는 뜻도 있음이라。즉 배운다는 것은 간교함을 얻는다는 뜻이요 무엇을 부리(使)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개중엔 이것이 이런 것이요 하는 진상(대접)을 받는다는 뜻도 있음이라 곧 종을 삼아 부린다는것은 진상을 받는다는 뜻이요 여럿을 동참케한다는것은 대저苦樂을 같이하겠다는 뜻이니 기쁠땐 모다 좋다할 것이나 생각이 멀리 밀치지 못하면 그 씀이 닥칠때는 서로가 감당치못해 흩어진다는 것이다。간교함을 얻었으면 깨달았다는 뜻이니 굴레

고(罟)가 하나 더 형성되었다는 뜻이요 진상을 받았다는 것은 주제에 저가 높다는 뜻이니「내라」하는 삿된 진리에 가깝다는 뜻이요 참여케 한다는 것은 쓰거움을 보이지 않는 나중事이라 접어두고 그 즐거움을 여럿으로 불려 누리겠다는뜻이니 진실한 뜻들이 모두다 그러해 굳건하다면 좋은 面이 오래도록간다 할 것이나 먹은마음들이 각자 딴생각 제 利속만 차리고자 한다면 쓰거움의事는 기쁨을 누리기前에 당도한다는 것이다. 本文엔 참여한다는 것은 여한없는 복락을 같이 누리게됨이라 희한의

고(罟)를 벗어치움으로 접어든 것임이니 그벗어치우면 나를 모르는

위치에 이른다는 것이다. 나를 모르는 위치이면 다른것인들 있어 알것인가? 설령 황홀하게 현혹시키는 보화나 선률이라도 耳目을 흐리게 하진 못해 그 이목이 없는 것 같아 모든걸 내팽게친것(탈파) 같다는 뜻이다.또한 그것들이 네나가 아닌 훤한 空限象 갈증을 없애는 물 한모금만도 못해 가련한 사탄의 꾀이는 모습으로 보인다는 것이다。既往 사탄의 얘기가 나온김에 한말씀 더付言해야겠다。(이는 정리때 머리에 돌은(回)생각이다) 이 뒷장 왜 그런가 章에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만 作用에 의한 反作用의 논리에 의거해서空의 反作用에 不過한 몇만년(불확실한 많은 억측년을 뜻함) 묶은 사탄이라하는 것이 있어 저절로 自我(무슨 자기를 내세우고 주장할만한 心幹=심대=줄기막대 같은것)라는 것이 形成되어 제가 이세상을 만들었다하는 창조주라하는 것이다.

실제에 있어선 創造主라 하는 것(사람의 머리속에서 그렇치 않을까하는 꾸며낸 생각속에 있는 것이지 그 變하는 物事證을 들여대면서 그있다.최면에 걸려있듯 하지만 그 없는 것이다.

((누가있어 기존신앙에 정면도전하는 말이라 할런지모르지만 내말은 없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없는걸 없는것이라 하는데 무슨 아니라고 죽기살기로 덤벼들어 두들겨 패주듯해야만 직성이 풀린단 말인가? 눈은 검은 안경을 쓰고 귀는 솜방망이로 틀어막다시피 하였는데 시비해볼테면 해보라이거다 이 말씀이다하는 내말씀은 그런 말씀인 것이다。일체것이 主라 하는 것이 사탄이며 사탄의 꼭두각시이니 이해득실을 갖고 꼬득이더라도 의연하게 대처하여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며 사탄인줄 알았다면 그를 도리혀 스스로의 이해득실에 利用코자해야 할 것이다。사탄한텐 義理는 必要없는 것이다。그나 그類들이 볼적엔 조그마한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고 겁없이 나된다 할런지도 모르는 사람이 주제넘게 창조주 하는 귀신을 계도할순 없는 것이고 저가 굳게 여우와 남게 까마귀이면 나 사람은 운무를 지을줄 아는 이무기는 못될망정 능청스런 능구렁이쯤은 대야한다할 것이니 그래야지만 저를 대처한다 할것이다。한 靈覺이 높아 그가 사탄인줄 훤히 알면서도 그저 여지껏 속어왔고 그가 사탄이라 공표하면 여지껏 하늘 인줄 알고 추종하던 무리들의 동요를 무어라고 무마시킬 적당한 계책이서질 않고 자신 또한 사람같지 않게 보일게 십상이라 해서 그저 좋은게 좋다고 모르는체하고 회의적이지만 시키는대로 꼭두각시 놀음하는 차원높은 覺을 가진 머슴이요 심부름꾼입네하는 者도 더러있을 것이다.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흐르는 것같아 여기서 다시 방향을 바로잡기로 하고…)) 諸般모두 空들이 空象化하여 온 것이니 저쪽과 이쪽이란 경계지은 것을 파괴하듯 그 往來하는 통로를 확장시켜놓고보면 그 넓이가 宇宙이거늘 즉 저 이가 없는 것이고 그냥 이대로가 空이며 空象들인데 이를 누가 만들었다하는 말에 속아넘어가는 空象들이 내보기엔 안타까울뿐인 것이다。즉 世上은 누가 만들어 있는것이 아니라 緣連지어진 저마다 空들의 활동에 의해 일해 놓은 諸空들의 터전이며 그 空象들인 것이다.神이라하는게 또한 空類의 一片도 될 수있으나 자아를 내세우다보니 내세울 꺼리(件)감(일감하는 감이 마땅찮아 세상을 제가 만들은 걸로 저를 내세우는 꺼리 감을 삼음이니 곧 사벽된 끝의 큰 주장이라 제(自)生成됨을 염두에 두지않는 空象들을 제가 만들었다고 세뇌시키듯注入시켜 속이고 있는 것이며 슬픔을 자아내게하는 가련하고 처연한 몹을 짓게하는 가하면 사람의 대해 心琴을 울려 同情을 이끌어 내어 제말이 씨알이가 먹혀들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일체것의 온전치 못한 空의形局들을 利用 (이 또한 따지고 보면 그사탄이라 하는게 제(自)몸를 풀어벗겠다는 그 願(念願=상념 할 수 있는 空象들을 통하여 염원한다.그것이 무슨 상이 되었던간 말이다。空은 萬類다)에 의해 온전치 못함을 조장한 것이나 진배없음이니 제주장을 펴기위해 그 空들에게서 甘言의 意와 같은 詐欺를 침에 그러함을 알던 모르던 원을 들어준다는 立場을 가진 空들에게서 自(자)사탄이 그 空들은 내가 氣를 빼앗음으로 온전한 될걸 덜었음으로 그렇게 되었다 여기게 되고 실제에 있어선 저마다의 空들이 불완전한 것을지어 제공해주는 허울 역할을 함인 것이다. 즉 말하자면 임자없는 바람에 나뒹구는 과일처럼 임자 나서지 않는 세상 제것이라 여기는 것이라 실제에는 임자 없는 것이 아니라 世上 空들이 主人이라서 굳이 主人행세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사람의 마음에 가련한 生覺을 일으키게하여 제뜻을 추종케하는 것이니 一切의 如何한 모습을 짓더라도 속이는 수단이니 그에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또 기껏 空들이 이룩해 노은 것을 그功을 가로채길 잘하니 흡사 멍석말림에 바람불게안해 티겁지 않 들어가게해 훼방 놓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룩해 준것이나 진배없는 것이라 하는 것인지 저를 찬미하라는 것이다.그러니 그런 功을 제게 돌리게 하고 찬미하라하니 도둑같은 마귀사탄이라 (아닌가)할 수밖에 더 있을 것인가? 또 한편으론 세상을 창조했다하는 사탄한테 왜 속게 되는가? 이는 모두가 삶에 얽매이다보니 고달픈데만 벗어나고 싶은 심경이지 그런데 신경쓸 여가가 없고 또한 굳이 그런걸(제된바 來歷)새겨야 사는건 아니고해서 한적한 뒷켠으로 물러놓은 物처럼 하는 것이 오랜 代를 내려오면서 되새겨 전하는 이도 없고 해서 잊었음이라 잊음이 오래된 습성처럼 되고 오래된 습성은 原來가 그런 것처럼 여겨 貫行化되어 저된바 理致를 잊어먹게된지라。즉 모르는 것이 된것이다。사탄은 이런 약점을 利用 제주장을 펴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사탄귀신 (귀신은 마음속으로부터 門이 열려 去來케 되는 것이다)을 설득시켜 흐름(世態 및 各自의 行事에 대한 適應)이 삐그덕 거리지 않고 윤활유를 친것처럼 잘돌게 할려면은 空을 밝히는 主張을 바르게 하고자하여 그 귀신에게 탈잡히지 말아야 한다。즉 빈틈없는 갖춤이 있어야 파고들질 못하는 것이다。이는 곧 아무도 보지 않는다 하여 사리에 어긋난 행동을 지으면 마음에 가책이 오는 것처럼 그것은 귀신더러 내잘못있다고 보라고 귀신門을 두드리는 것과 같음이니 合理性을 띄고 있다면야 귀신이 가만히 있을래기지만

합리성이 배제되었다면 귀신은 그것을 꼬투리 삼아 당장 덤벼들어 해코져하리라.무슨 행위를 하던 떳떳하게 행하여 일체마음에 가책(죄의식)을 짓지 말것이니 설령 도둑질이나 살생을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했어야만 했다는 그럴듯한 辯才(굳이 理致를 논할게 아니라 빠져나갈 窮道를 말하는것이니 그럴듯한 핑계나 빙자)를 갖고있다면야 아무런 가책이 들지 않는다 할 것이다。그렇게 되면 가슴가운데 있는 명치끝 횡경막이 뒤집히는듯한(철렁하는) 감이 오지않는다 할 것이다。사람이 뭘 깜짝놀라는면이 당도하면 횡경막이 뒤집힌다 한다.

이제 앞서의 여지껏 한결같이 주장해온 줏대를 뒤집어서 아무러크소니는 줏대가 있다。또 줏대가 없다한다.이랬다 저랬다 그렇게 계속하는 것이 一末의 줏대를 세운것이 된다는 것이라고 한다.그러므로 아무러크소니는 진리도 될수 있다.아니 진리이다。아무러크소니는 진리이므로 모든 것을 바로보고 그에 대어들기도 하지만 그 理致가 확고하다면 순종하기도한다.모든 사물은 아무리크소니로써 그 위계와 질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왜냐하면 그된대로마다 아무러크소니로써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저 밥솥 이 이불 저장농 도로에 행하는 자동차 새의 지저귐 나르는 꽃향기 그를 쫓는 벌나비 풀벌레 부글부글 끓는 두부찌개 동태찌개 人事 行事 복덕法 정치 미신 귀 신앙 주의 이념 등등 어느것 빠짐없이 실로 진리에 의한 것이때문이다.이 모두가 실제있는 것이니 실제 있는 것은 그眞理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九二、六、五、丑時 정리 九七、十、一、晨、辰時

어떤 미친귀신 믿는 이가 이앞의 글 창조주 하는 것은 오래묵은 얽힘 反作用에 의한 空現象類 邪誕)

을 훑어 본다면 필자더러 逆天운운해가며 하는 말이 ( 넌 父母도 없이 이 세상에 왔냐? 어디異常한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졌냐? 事理를 엮지(모으지) 못하는 곳에서 왔냐? 창조주 하나님 개념을 무시하게。」별아별 질책하는 말을 모두 동원해가며 조목조목 제편을 두둔하는 말을 할지모른다.또 말하길 부모를 몰라뵈고 존장을 몰라뵈고 眼下無人格으로 붓끝을 놀린다 할런지 모르는 그저儒家의 綱令과 같은 뜻을 輕視하면 秩序가 서질않는다는 뜻을 꼬투리삼아 눌러잡으려 하나 이는 틀에 박힌 관념 가까운 주위관점이요 멀리내다본 거시적 포괄적 관점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그 억매이게 하는 사상이념이나 신념같은 것의 執着에서 떠나서 포괄적 공허의 관점에서 제반 일어나는 物事現象을 觀察한다면 그事物의 生息現象은 보잘것없는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필자가 말하길 모든것 그 以前에 공허의 관점으로 내가 있었다 하지않았는가? 내가 그 以前에 있었다는 것은 내가 여기오는 길을 닦고 만들었다는 관점이요 그 中에 있었다는 것은 居處하고 누리는 관점이요 그끝(末)마무리 할곳에 있었다는 것은 어느 하나의 엮은 허물 굴레를 벗고 새로운 곳을 向해 발을 디뎌 놓을 관점이라 함인 것이다.

또 말하건대 내가 밟고 온 길이니 어찌 공경하고 섬기지 않을 것인가? 이것은 父母를 마지못해 허례로 모신다는 생각이 아니라 自己 自我의 위상을 높히고 重要視하는 것이라 어찌온바의 길을 높이 받들지않을 것이며 존장을 공경치 않을 것인가 하리로다。그곳이 곧 綠綿이 이어진 나의 끈이며 나이며 공허의 있음을 표현하는 內面의 현상인 것을 저마다의 空들의 立場이 모두 다 이러하거늘 누가 감히 空들을 창조했다는 위치에 서겠다고 망녕된 행동을 한단 말인가? 만약 서겠다면 제 空의 역할을 방해하고 억누르고 해서 제(自) 利속을 챙기겠다는 사악한 사탄의 관점 흡사 짓는 개들에게 自我心性에 와 닿길 시끄럽게 느껴진다고 짓지 말라고 바보되는 주사를 한대씩 놓아 멍청이를 만들고 저(自)가 그개를 낳았다 하는것과 같다할 것이다. 이 또한 능력이라 하면 능력이 될 지 모르리라。九七十五日震(정리때 년월일시)

삿된 생각이 진리처럼 짚히길 저 빛이 더욱 빛나게시리 철저한 암흑이 되리라 한다.九十二年 六月四日 立案 年月日時

◎ 時間의 形態와 功果

시간은 용수철 흐름과 같아 꽉 눌러서 만나게 하려해도 만나지 못하는 거 같아 끊임없이 이어져 돌아 그 空이란 것을 形成한다。어제의 지금과 오늘의 지금과 그 흐름의 싯때는 같아도 어제와 오늘이란 名分이 다른 空을 形成하고 과거와 현재란 그 名分이 다른 時的인 空을 形成한다。또한 모순된 말이다.

◎ 뭐뭐 어떠한 (여러가지)능력의 성질이 憑依現象을 일으켜서 自己의 뜻과 관계없이 이상한 행둥이 發出된다거나 如他能力現象이 일어남에 그러한 능력을 행사함을 자기 本心身이 제어할수 없는 재주를 갖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겨서 내모르는것이니 너 좋을대로하 면 그러한 능력이 몸에서 집하여 설령 心身

을 희롱터라도 벗어난 것이니 아무러크소니에 가까우리라。혹이 道가 높은체 질책하듯 心氣가 단단치 못해서 잡다한것 한테서 희롱 받는 것이니 그러한 능력(하다못해 고뿔앓는 것까지도 그 능력이라 한다면 능력이라 할 것이다)을 行事함을 부끄럽게 여겨라 한다면 그러한 능력을 行事치 못해서 그렇게 말하는 자이니 그런자가 이쪽의 능력행사를 역이용할까 두려워하는 바이나 제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러하려

니하고 처연히 여기면 벗기움에 도움이 되리라。一言해서 능력이 있다는건 힘(一存

고)의 집한(거처를 제공한) 희롱이니 부끄럽게여기란 뜻이나 그것으로 삼라를 탈파시킴에 도움이 된다면 어찌 내라하는 삿된진리에 놀아난다고 거부만 할 것인가이다. 이런 뜻에서 그자(누구든 상관없음 사탄이던 하늘이던 농군이던 회사원이던 노동자이던 일하는 자를 말함)가 봄에 씨뿌려 여름에 가꾸어 가을에 왼손에 포기를 잡고 오른손으로 낫질함은 수확을 얻고자함이니… 왜냐 풍요로운 보람으로 제반 힘들었던 시름을 벗고자함이다。그一存고(罟)도 이처럼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그러나 벗지 못하니 왜 一存고(罟)란 진리로 있음으로서니라 몸부림치는 소용돌이는 영원한 우주였으며 宇宙이리라° 저가 저를 치료하겠다는데 누가 벗어난자가 病됨으로 몰것인가? 도리혀 잘하는 일이라 할래기지… 그 病이 남이 아니고 그 藥만이 자기가 아니나니 병약이 모두 제것인데 제가제것 가지고 희롱하는데 누가 그 벗어난이가 탓하랴? 관여치 않나니라 구경하는 것까지도 탓이라한다면 보이지 않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하는것 까지도 제것이라 우기는 억지쓰는 바보같은 양반이 하나님인가 하리로다。그 牧者라 하는자가 그의 낫과 같은 도구에 불과하고 그 病됨과 잡것이라 하는게 그의 수확하는 이삭포기에 불과하다。이 모든게 쓰임새 효험으로 사랑받다가 낡은듯하면 모두 버리거나 태워 없애거나 하리니 天堂이 어드메며 地獄이 어드메뇨 하는 悔恨만 생기리라 사랑이라 꼬득이는 말 어휘와 그 뜻이 원래 그 반대의미(배반 미움)를 내포하고 있음이니 놀음 과정속의 一片에 불과하리라. 미워한다는 뜻이 없다면 사랑이란 뜻 또한 있겠는가? 애증의 반복되는 갈등은 諸고(罟)의 役事가 되는 것이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땅에 숨겨놨다가 며칠 있다가와서도 잘도 찾아낸다。짐승 미물도 이러할진데 하물며 총명타하는 사람이야 말할나위랴? 더더욱 그머리에서 꾸며내는 하나님이라하는 삿된진리의 견해야 그 능력이라하는 것이 全知全能 無所不爲이라 유혹은 限이 없어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이니 모두 그 진리라 하는 것에 들길 원한다 하리로다.아무리 그래봤자 信心에서 우러나오는 굴복은 없나니 무슨 감복할만한 과업과 功積이 있어야 할 것아닌가? 自我를 내세우는자가 혹 있어 그들의 일으키는 모임에 어쩌다 한축 끼어들게되면 同類에 젖어들게 할려고 갖은 현란한 장면을 연출해서 정신과 혼을빼어 포로로하고 나라(※내라 하는 마음을 들게 한다는 것인지 스스로의 정신을 망각시킨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함을 돌게하여 사리를 분간치 못하게 할지모르나 실로 나라하는 것은 원래가 없는 것이다。원래 내라는 존재나 그가치를 알아달라고 내세우는것은 삿된진리가 하는 것이니 제것이라하고 그 정신을 빼고 돌게하는데 아무러크소니가 무슨상관을 하리 왜냐 아무것이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아마도 기적 ((염원에 의해 기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혹 있다면 (또 실제 그래서 그런지 어떻게 확증할 것인가?) 그것을 보고 나라는 정신은 두렵고 겁이나서 벌벌 떠는 모습이 육신에 나타나 사시나무떨듯할런지 모르리라 왜냐하면 진리라하는게 格을 세운것에 反하는 (그가 볼적에)一切 모든 악업이라하는 것을 犯하여 罪意識속에 들어있을지 모름으로서니라。마치 도둑이 제발저려 자백하듯 이렇게 줏어섬길지 모르리라。「나는 그에 포로되리라」나는 그의 최면에 걸려 그를 찬송하리라 나는 그에게 진실로 항복하고 종되리라 나는 그를 찬미하리라 시키는대로 그를 살찌움에 一助를 하기위해 내몰림을 달갑게 받으리라。패배의식속에 심신을 서리서리 도사리고 있어 큰잘못 있어 벌받고 있는 형국을 짓는것처럼 해가지고 보여주리라。지금 그의 나들이 온누리에 가득 찼어라。그런데도 그는 무엇을 위하여 종을 울리듯하나 이탈할까 종을치나 나의 후예까지 그를 배반할까 두려워서인가? 흡사 의붓애비가 친애비라 강조하듯 말이다. 믿지못할 자식과 같은 나(희)들 의심스러워 서인가 철없는 자식들 돌보기 위해서인가 아무튼 뭐래도 좋다 상관없다. 그러나 아무것이는 아니나니 왜냐하면 아무것이는 그 내라 하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九二·六月·四日、九七·十·六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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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모와 오욕을 베풀면 수모와 汚辱으로 되갚아 주느니라(이것이 또한 머리속에 들은 생각이 그렇게 짚히는 한편의 관념이다)。가련타고 은혜의 뜻을 앞세워 수모와 오욕을 주면 멍텅구리도 반발하여 굴르리니 이것이 그 앙갚음이 아니고 뭔가? 일체 어떤 모습이 눈앞에 닥치더라도 동정치 마라 동정하게 되면 스스로를 동정 비하하는 것이니 일체 동정치 말고 내一身처럼 여기면 내라하는 自尊者가 消滅되리라 아무것이가 邪見을 내어 天神이나 보살의 이름을 빌어 그가하는 말씀처럼 흉내를내대 이것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이니 잘 들어봐라! 예전에 내가 저 忘我山下에서 수련할제에 하루는 산길을 가다가 토끼가 덫에 걸린걸 그 덫 노은 자에겐 미안 하지만 풀어 나줬다。그 허우적거림이 애처러워서였다。그랬더니 그 도망가며 하는 짓거리가 내마음에 이렇게 와 닿았다. 바보처럼 놔주긴 왜 놔 줘 그렇게 고통을 겪다 탈피하게시리 그냥 놔두지 남 벗지도 못하게하네. 그가 도망가면서 원망의 눈초리를 해 가지곤 이상과 같이 말하는 것 같았다. 그가 진 짐도 무거운데 내가 또 그에게 두덩어리의 큰 돌을 지게하였으니 오직이나 무거우랴? 은혜의 집과 동정멸시의 짐이니 내게 무엇으로 갚을고 하다가 저마다 능력의 한계가 있으니 길가다가 돌뿌리에나 콱 걸려 넘어져라 하는 것 같다. 수모를 받음이 이와 같을진데 어찌갚지 않으리 格을 끌어올려 갚지않고 끌어내려 갚나니 만나지 않아야할걸 만나게 되고 보지 말아야 했음할걸 굳이 보게하고 네가 저쪽의 위치에 처해서 그 報( 앙갚음)를 받나니 창피스러우면 은혜가 원수만 같고 그 처지가 야속하리로다 저걸 어쩌나 여기게 함이 야속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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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까지 광증 일보 직전장으로 , 아무러크 소니 일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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