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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등

투가리 부젓갈 2023. 9. 12. 03:56

◎ 宇宙가 빅뱅(대폭발)이다 한다면 또 팽창중이다 한다면

(※ 과학자들의 說에 우주는 一秒만에 여건이조성되어 三分만에 대폭발을 일으킨게二百億、三百億年이라 한다) 그 中心部分은 空洞化現相이 일 것이니 즉 모든 질량이 되려 올려가던 날아가던 무방으로 퍼지던 할 것임으로 즉 앞서 나아가는 질량이 견인차

역할을 하여 끝내는 다말려 올라갈 것임으로 지금의 시공질량은 다 날아가고 가운데 구멍은 점점확대되어 분명 새로운 세계일 것이니 그것이 지금 시공 창막이 얇다못해 찢어지고 터지고 뚫어진 틈새로 보이는 것이 블랙혹같은 것이고 異相界일 것이다.

생각해봐라 지금 시공우주세계에서 發하는 빛조차 들어가지 못하고 되말려 날아올라가던 팽창속도가 빨라 거기 닿을 수 없다면 분명코 중심부분이 공동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막이 얇아서 터진 틈새로 보이던가 터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얼비칠 것 아닌가? 空洞化가 빛을 빨아먹어 빛이 사라지는 것인지 시공우주가 되말아 올림으로써 거기닿지 않는 현상인지 우째 알 것인가? 이 말이다。또 창막이 터지는 곳이 한군데만 아닐 것이니 여러 군데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누가 알 것인가? 이 모든 것이 궁극엔 추측에 지나지 않는 망상 해탈일 뿐인것이다。이것을 逆相이라 하는 것이다. 펑 하고 터져나간다면 일편으론 되말려 들어감도 있을 것이니 생각해봐라 °어떠한 껍질양상의 질량으로 된것이라면 들어간 것이 있어야 나올 것도 있다할 것 아닌가? 흡사 겹토시 자루가 뒤집혀 들어가면 저쪽에선 되싸나와 올라오듯 이것이터져 퍼진다는 것이 항상 그 형태를 띈 운동에 지나지 않는 無爲流動이란 뜻이니 나오면 들어가는 것 있다는 뜻이다. 즉 無方으로 퍼져나가면 무방에서 수축해 들어와 항상 그상태를 유지케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점화를 뚫고 저와 이쪽이 交差되어 튀어나간다 하더라도 맨ᆢ똑같은 逆方式에 의해 튀어 들어오는 것 있음으로 항상 그 상태를 유지케 된다는 것이다.

大我相이란 뭣인가? 전기 交流가 일어 전등불을 밝히듯이 來往의 속도가 빨라 원위치처럼 보이는것(변치 않고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大我相이라하는 것이니 너와 내가 번복됨의 속도가 빨라

一色相의 幻影立體를 띄는 것을 말한다。흡사 영화관의 영사기에 걸린 필름의 속도가 自然스런 연계동작과 맞게 되있어 영상이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의 相처럼 보이는 것 같음을 말한다.

[후담 지금 과학자 들이 말하는 양자 역학 동전의 앞뒷면 일도 되고 제로도 되고 붉은색 파란색이 동전 팽그르돌아 보라색을 띈다하는 것과 유사한 말을 하고있다]

이 뜻을 달리 例를 들어 유추한다면 내가 너를 죽이거나 잡아먹는 現實의 現상태의 相은 그 以前 劫에 너가 나를 죽이거나 잡아 먹었음으로 내가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이고 다음엔 또 너가 나를 죽이거나 먹는 모습이 바로 이런 상태이다 하는 것을 속도감을 부자연스럽지 않게 빨리한다면 바로 현상태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케 된다는 것이니 곧 바로 현상태 이 모습의 껍질뿐이란데 결국엔 도달케 된다 할 것이다.

現원위치 상태를 유지하는게 제삼라의 껍질양상이라는 것이다。그러면서 부자연스럽지 않게 생활양상변모의 모습을 띄어가는게 제삼라의 生消活動相이라는 것이다。생소의 끈이 양상의 껍질이 되어 그림조각품 처럼 우주에 새겨져 있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니 뜻과 말이 나고 사라짐이지 그것은 허울껍질의 번복되는 흑백무늬와 같을 뿐 이라는 것이다。그래서 大我相은 生消를 一片의 허울옷 정도로 여김인다는 것이다.

[후담 광자 빛보다 빠른 것이 없다 한다 물리 과학자들이 아직 발견치 못한것이고 빛들의 속도가 왜 일정한가 한골수에 맺혀선 누가 이론 그럴사하게 전개함 그걸 신봉하는 것 일 더하기 이는 답은 삼처럼ᆢ 그런데 답이 오가 되고 육이 되는 걸 연구도 않을뿐더러 모르고 있는거다 그냥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주장을 맹신 할뿐이다 입자와 파동은 한몸이라 한다 입자이며 파동이라네 ᆢ 양자(量子)입자(粒子)라는 것이 거리감을 초월 하여 동시 똑 같이 반응한다는 고만ᆢ 이쪽에 돌 리던 동전이

앞면 나옴 거리감 초월 저쪽 동전 돌아가던것도 동시에 돌아가던 것이 스톱되며 앞면이 나온다한다 내가 앞서 주장한 십사일심(十四一心) 육합(六合) 팔공처(八空處) 대칭(對稱) 사선(四線)을 한선으로 줄여 표현하는 艮坤 동북 서남 대칭 점선 일선으로 말한 것 그런 이론을 과학으로 증명 했을 뿐인거다 자리만 방향성만 구분 지어진 것이지 역시 土다 이런말씀 ㆍ그런 다음 다른 성향 오행 즉 나머지 사행이 풀어져 자리를 잡아선 입체를 이루며 변화를 갖게되니 시간이 생성 풀려져 나오는 모습을 그리게 되는 거다 그래서 공간이 풀리면 시간이고 시간이 엉기면 공간이 되는거다.],

그러면 이러한 뜻의 논리를 왜ᆢ대아상이라 칭명해 보는 것인가? 그는 곧 너ᆢ나란 구분짓는 개념시 소멸된 상태의 相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이 大我相은 차별이나 구분짓는 것에서 집착함을 떠난 것이 곧 有相이 無我相(상을 두었어도 내라 함이 없는 상)이 되었다는 것이다.우주시공 껍질은 곧 이러한 논리에 의거하여 지어지거나 形成되거나 緣起되어 전등불처럼 있는 것이니 누구를 먹는다거나 먹힌다거나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단지 이것은 껍질된 바의 사소한 토막들 內容이 그렇게 구성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大我相으로 봤을 적엔 삼라활동상이 활동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일 뿐인 것이다。我相(내라는 相自他 등 구분지어 차별을 내세우는 相)을 버리라는 뜻이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我相을 버리면 대아상은 無相器이라 無相器一器되어 시공을 御車(어거) 圖謀한다는 것이다。대아상은 空이며 空의 役事이다.空의 역사가 그렇게 나타나 제반게있는 것이다.

이 直流전기로도 전등불을 할 수 있다한다면 그렇다 할 것이니 너가 나를 먹고 내가 너를 먹는 것의 번복이 大意的으로 순환의 理致의 一部分의 기관 구조형태가 그렇다 한다면 大순환의 이치로 제 현상이 있는 것이니 하필 직교류현상만이 아니라할 것이다.이렇게 大我相이 大순환의 이치로도 있다한다면 이의제기에 떳떳한 답이 된다 할 것이다. 둥그런 테의 相을 띄어 서로의 口가 상대방의 尾를 相食하는 形局이라면 그 둥그런 테의 현상은 아상의 언제까지나 무너지지 않는 모습이라 할 것이다。지금 그 모습이 시공 우주 삼라 제 현상의 모습인 것이다。

◎ 果와 먹는 자와의 사이에 있어서 果가 해탈맛 보임을 염원하는데 그것을 들어 주는 것이 보살의立場인 것이다.그러므로 먹이는 果에 대한 보살이다。果가 먹을제에 찡그린다 한다면 해탈맛 보이는 수순이 그렇다는 것이다。먹는 자가 먹기를 염원한다 한다면 果의 位置가 보살이니 먹는 자의 원을 들어줘 염원성취 해탈과를 이루어 주기 때문이다。입장이 같아 진다는 것은 身土가 不二하다는 뜻과 같아진다는 것이다.

쓴 말을 거듭 쓰게되는 面이 있게되는데 이는 머리에서 번뇌망상이 계속 변하여 척도를 달리하여 일기때문에 그 뜻을 아니 쓸 수 없어 무엇에 홀린 것처럼 붓끝을 놀리게 되는 것이다. 시야를 넓힌다거나 좁힌다거나 하는 구분을 타파하면 평등개념이라는 것이니 그냥 이대로의 지어진 行相에 맡겨둔다는 것이

다。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절로 그러하다는 것이니 겉모습(껍질=속이 그러니까 겉모습도 그렇게 나타나지 할런지 모른다 그렇다 속性相이 여러 모습을 그린다 할 것이니 그것은 표현되지 않는 그릇의 相의 일고있는 여러 波紋임을 부정할 순 없다)일 뿐이라는 것이다。그러므로 부귀의 相을 띈다하더라도 하나도 즐거워할 게 없고 가난의 相을 띄는데 자신이 한 몫을 차지한 처지라도 하나도 슬퍼할게 없다는 것이다. 일체 것이 껍질이니 슬프고 기쁨 등의 원인과 그 양상이 모두 껍질이라는 것이다.그래서 앞론과 반대되는 뜻인 부귀타고 그 부귀한 행색에 맞춰 즐거움을 짓는 모습으로 장단맞추고 빈천타고 그 행색에 맞는 모습으로 장단맞추고 그를 떨쳐버리겠다는 마음으로 의연함을 지어보이는 모습 등이 또한 벗는 껍질모양이니 하나도 탓할게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일궈 功業이 있으면 누릴 것을 여축한 것이라 이것이 극락이라는 것이니 마치 목욕재계하고 새 옷 새 음식 새 놀이(연회)에 들려고 경건한 상태를 띌 때가 극락의 門이라는 것이다。이것 저것 누리고 나면 정전기가 일어 틔겁지들이 묻듯 오탁함에 물들었음이라。이렇게 됨 타락상을 띈 것이라하니 다음 단계로 접어들어 갖은 오역한 냄새를 풍기게 되어 이것이 지옥이요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이 새로운

(罟)果를 갈구하는 것이니 갖은 苦行이라는 것이다.그래서 또한 이 터전을 두고서 달리 罰福의 根基가 없다함인 것이다.

顚倒의 生覺相이란? 그 以前이 가난하였으니 지금 부귀하여야 한다는 것이고 그 以前이 부귀하였기 문에 지금은 가난하여야 한다는 것 이게 전도의 생각상이 라는 것이고 그 이전이 부귀하였으니 아직도 盡한 기운이 남아 지금도 또 부귀의 운명을 타고나게 되고 그 이전이 빈천하였기때문에 아직도 그 因果가 다하지 않아 그때 짓던 모습 그 동작相을 띄고 태어난다는 숙명론과 같은 것은 똑같은 現相論이라는 것이

다。너가 그때도 생각이 보리밭에 가있어 法文을 깨닫지 못하더니 지금시에 당도해서도 딴전을 피우는 바람에 法文깨달을 기회를 놓쳤고나하는 것은 똑같은 시운이 거듭온다는 것을 가르키는 자가 하나의 방편의 例를 들어서 엄포공갈로 가르키기 위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다。똑같은 시운이 있기때문에 한나무에 여러 같은 열매가 달리는 것이요 전도의 시운이 있기때문에 역할 분담이 나누어지거나 바뀌어 잎사귀와 줄기가 되기도하고 그것이 또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기도 하는 것이다。깨달음의 기회를 놓쳤다에서 왜냐? 그것은 두 번 설명할 現相의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마치 해와 달이 그 지점을 통과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무언가를 가르키는 거와 같이 그 기회를 놓치면 해와 달을 삼차원 物理로썬(뒷걸음질 치게하여) 다시 그 상태를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이것도 망상이 구름일듯 함을 이끌어 옴이니 그 요즘은 비디오 촬영기 같은게 있어 촬영해 놓으면 그 녹화된 필름을 되감기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과거 상태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무엇이 어거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제절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시공이 本性에 껍질의 성격을 띄고 있음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니 흡사 本性의 幻影과 같은게 껍질이라는 것이니 괴뢰나 꼭두각시 관점으로만 볼게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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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相은 時相이 演出하는 단막극에 있어서 하나의 보조역할을 담당하고 있다할 것이다。보조역할을 하기위해서 소품이 조성되어 있는거와 같다할 것이니 공간이나 공간의 諸象이나 그 活動象은 그때그때의 時相影像 單層撮影을 돕기 위해 소품으로 있는거나 같다할 것이다。그 時相으로 논한다면 一人의 相이라도 無數量으로 많은 것이니 자연스런 연계동작으로 지어져 있음으로 그 찰나 未分時間의 時相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질 뿐인 것이다. 즉 삼라 動靜相이 부자연스런 연계동작의 時象이 아닌 것이다. 그때 그때를 충실하게 채우기위해 그때가 무엇을 요구하는가에 맞춰 갖추어져 있는 것이 공간象이다。

宇宙는 自然스런 連繫動作에 의거해 현상되 보이는 것이다. 즉 以上 不充實한 덜된 (모자라는 생각) 글로도 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그 藥의 效用을 높이 쓸렴 먼저 病亂을 일으킨다。병란의 폐단이 극성을 부릴때 그 다스림의 미명아래 약을 쓰게되는 것이다。所以 성인군자 나갈렴 성인군자 나아간다고 앞에서 먼저 소인잡배 훼치는 (활개치며 소리치는)거와 같다 할 것이다.또 빽빽한 콩나물시루속에 콩나물 中 누워 크는 것도 있다고 貴한待接을 받을 것은 미천한데 둘러싸여 있어도 귀한 대접을 받게 되있는 것이다。그래야지만 귀한 것이 뭐인지가 돋보이게 된다。또 그 藥의 힘세기가 마치 잠자던 힘센 자가 어떤 要因에 의해 깨임을 받아 들고 일어나 현존하는 諸상태의 흐름을 밀치고「물러나라!」하는 거와 같아 그 현존상태가 경천동지의 기세에 눌려 엎어지는 모습이 쟁기로 밭갈아 엎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언제라도 그러한 힘센 것을 조성하면 제 먹은대로 一千恨을 풀 수 있다는 것이니 한마디로 가뭄을 들러엎고 천둥번개하며 단비가 내리는거와 같다 할 것이다.

이것이 그 힘을 얻기까지 남모르는 겪고가 있는 방식이니 알라딘이 램프의 힘을 얻는거와 같다 할 것이다

世上의 모든 事物은 이렇게 亂魔스런 모습으로도 보일 수 있는 것이다。그 난마상의 들여됨이 양지쪽에

선 띠풀이 잘자라고 음지쪽에선 갈참나무가 곧게 뻗는다고 이리저리 여러 생각을 기울기는거와 같으니 陽의 힘은 뜨거운지라 억눌러서 음지의 쉴 곳을 찾게해서 平平하게 퍼지게하고 음의 힘은 찬지라 個體들이陽을 보려는 노력을 돋구어서 끌어올려 수직을 만든다는 등 이리저리 어지러운 亂魔象을 보이는 것이다.

◎ 釋聖人은 時間에 의한 수직적 因果관계를 業果報라 말씀하셨는지 모르지만 이것을 수평적 因果관계로 논다면 現實的인 森羅諸樣相의 空間象인 것이니 즉 我와 我周圍處所相이라 할 것이니 만약 정신으로부터 그 以後 모든 形象은 我所가 된다할 것이다。정신 그 이전 토막지을수 없는데까지도 我所라 한다면 진실로 我란? 뭐란 말인가? 我는 없는 것인가? 지금 我所라 말한 것들이 모두 我일 수도 있을 것이니實我가 本性이라고 自處하는 器 또한 그 속에 있을 것이니 달리 모색은 없다 할 것이다)一切의 他는 없는 것이다。一切의 他가 없으니 我와 我所라하는 我相인들 있겠는가? 現相界는 곧 空本性의 發露로써 이룩된 해탈된 겉껍질 모습인 것이다。쉽게 말해서 현실의 諸象界는 西氏論 創造된 被造物事란 것이다。이렇게 되니 西釋을 나누어 더 말할게 뭐가 있는가? 이 말이다(그 시공간적인 다군락상이 我의 諸劫相의 모습이라는 것이니 我를 頂點으로 無方으로 퍼진 모습이 과현래라면 만약상 我相의 흐름을 제대로 관찰하는 이가 있다면 我劫의 지난 모습이 어떻고 현겁이 어떻고 추구하는 미래지향 겁이 어떻고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사료된다。사람의 추구는 좀더 낳은 면을 추구케되니 이게 곧(염원상)이니 業報에 의함도 미래果가 달렸다하겠지만 진창은 멀리하고 마른 길을 가고자 할 것이니 이또한 조성된 여건이나 때에 따라서일 것이다.) 西釋논의 기롱거리는 말을 더 쫓을게 없으니 과거미래란 本末을 접고 현실에 충실하는 삶의 行爲에 초석과 동량 및 成家되는 儒氏論을 따름이 어떠하랴? 지금 世態의 治法이 개량된 儒氏治世方法을

채택한 것이라 할 것이니 마땅히 儒家의 論을 崇尙해야한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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力이 黑白 等 兩比론을 세우는 것이니 一定한 準則이 없는 것이다(正邪의 例에 있어서 저 나무가 서 있는 것이 바른 것이라 하는 것은 힘이 그렇게 만들고 그것을 가르켜 바른 것이라 하기 때문에 바른 것이 된 것이지 그렇게 서있는 象이 그른 것이라 한다면 그른 것이 될 따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天地의 指稱이 따로 없고 天地의 指稱이 따로 없으니 天地의 生態指稱이 따로 있겠는가? 위태한 가르침 같지만 罰福이 따로 없으니 世人의 心相行의 蠶動을 막고자 하는 의도에서 방편으로 쓰일 뿐이니 上路를 밟고자 하는 자는 下路에 拘碍될게 없다 할 것이다. 마치 時隨直的 果報를 空間象으로 펴서 空을 누르면 (理論으로 누르면 成果 또한 기울어진다.)기울듯 한쪽으로 치우치게 달리게(走)하여 염원의 성취를 이룩하려는 목적하에 諸相을 演出하게 되는 것이다. 똥을 보면 더러운 마음을 일으켜서 돌아가게하고 꽃을 보면 눈길을 줘서 즐기게하는 것이니 양비 多比도 이와 같아서 그 삶의 편의대로 준칙을 세워 편가름하여 善이란 相을 들어서 善을 추종케하고 그런건 惡이라하는 惡相을 亦是 들어 그것을 멀리하는 것으로서 諸生行의 악을 멀리하는 방편을 삼은 것이니 본래부터 善惡이 힘보다 우월한 것은 아닌 것이다. 즉 이러므로 힘이 一等이란 것이 나온다.그러니 全知能力이 存在하는 힘의 所在處에 아첨하듯 의지코지 않으리.

((의문의 번뇌가 또 일어 아니적을 수 없어 적어보는데 즉 힘에 의자코자 하는 이유가 생긴다。힘에 의지코자함은 왜냐? 이것이다: 그 힘 보살(힘이 끼치는 영향혜택 등)의 덕을 입어 염원을 성취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런데도 釋言하시길 諸양상知見解에 의지치말고 (머무르지 말고) 生心하라하니 이것이 또한 편견이 아니던가? 한다면 그대가 지금 생각의 뿌리가에 엷게 박힌 자에게 말씀하시는 작은 가

다듬을 갖고 뿌리가 깊이 박힌 큰가다듬의 깨뜨림을 결부시키고자 하니까 뜻이 씹히는 폐단이 나오지 그法文은 그 法文대로 果를 이루게하고 이 깨뜨림은 이 깨뜨림대로 成果를 삼으면 그러한 폐단이 일지 않으리라 한다。邪私롭게 區分짓는 것에 마음을 일으켜 의지하면 편가름하여 어떤 한것에 치우쳐 집착하게되어 집착에 얽매이면 훌훌털고 벗지 못하게 된다는데서 이른 말씀이요 (心의 覺根이 엷게 박힌 자의 지견관점은 편지견을 이루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래서 모순이라는 것이다。앞서의 여럿의 主題의 글들에선 편지견으로 벗어치운다 해놓곤 여기선 어린(幼兒蒙昧)관점 몰아붙이는 경향은 자잘구레하게 틀어 돌아도 한참 틀어 돌았다는 것이다) 사사롭게 구분짓지 않으면 一切가 구분없는 無指稱 破脫果보살이니 무지칭모습(한덩이모습= 이것이 이래서「하나하면 둘이 생각나서」말뜻이 씹힌다는 것이다)처럼되어 무지칭이 (전체가)무지칭으로(전체로= 이것이 이래서 개별적인 생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전체하면 그相反되는 생각이 또는 多分觀의 생각이 일지 않겠는가?) 깨어나간다(이 또한 상반응 작용을 일으킨다.즉 우민하게 수축해 들어오는 것도 있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는 것이니 전체가 무방으로 뻗는 폭의확대 立志強化일 수도 있으니 전체가 깨는 성과를 맛본다는 것이다。모든 지칭에 헐뜯고자 하는 瑕疵가 잡히니 그리고 또 제 한 말에 걸려 넘어지는 자괴감을 맛보게되니 가만히 있는 모습이 상책 깨뜨림상이라 묵묵 言不答 無指稱이라 하는 것이다。大力은 大 가다듬는 깨뜨림을 낳으니 이는 聖人의 所在處다。初入門에 그것이 누구에게 기대어 덕을 입는 것 같지만 成果局엔 그것이 自己自性의 참歸依處인 줄 알 것이다。힘의 所在한 것을 하나의 모습으로 보아 편견의 관점을 일으킨것이라 한다면 힘의 길은 신경과 같고 모습은 짓지 않는 것이 없어 一切가 그 간섭에 들었으니 그렇다면 諸모습이 편견이란 뜻에 사로잡혔다 할것이다。이른바 편견이란 생각에 몰두 집착된 것이 편견을 낳았다는 뜻이다))。

그 힘의 所在處가

자기 理想追求의 本主題라 할 것이니 곧、제(自)信仰의 宗主인 것이다.

釋類書에 보면 劫(※ 四億三千二百萬年이 一劫이고 反對개념이 刹那이다)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뜻을 나름대로 푼다면 宇宙의 한도막의 開闢過程을 劫이라하고 그 한토막의 변혁된 宇宙界를 하나의 佛(覺醒)界相이라 할 것이니 우주의 一합벽의 상태를 논한 것이 무슨 불、무슨 불이라 할 것이니 現劫 中에도 四佛이 있다는 것은 네번의 변혁기가 있었다는 것이니 地球의 地質形成 상태를 본다하더라도 그 化石을 보면 생태계를 알 수 있듯이 쥬라기、백악기가 있고 빙하기가 있는 것처럼 그런 변혁기를 걸친 한 期間을 一佛界로 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이것을 순추측이라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그 시대의 文化와 覺象을 佛相이라 한다면 파충류나 저 地層의 모습이 곧 그것이라 할 것이니 하필 현겁의 諸모습 갖춤과 똑같은 것이 각성체라고만 생각할 게 아닌 것이다.

어느 種族에서 佛이 나왔다는 것은 인도국 계급제도의 四段階를 例를 들어 따왔을 뿐이니 어찌 생태계 以前에 그런 종족이 있었겠는가? 말하자면 어떤 界를 形成시키는 元素들 중에 원소의 優劣을 구분짓는 것과 같을 것이니 여기서 우월 열등을 말함은 깨임역할의 분담에 있어서 調和를 짓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니 그것이 우열로 보이는 것이다.

차등적 우열은 갖은 形 感覺相을 띄고 영롱한 五感 등 갖은 形감각을 발하게 되니 美學의 극치다。그元素는 질소,산소, 수소 등등 여러 가지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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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 언덕을 넘어 올적에 제반것이 그 상황에 맞게시리 갖추어져 그 어미의 새끼를 억울한 모습

으로 죽였다。그러니 그 報를 받지 않으랴? 보받음에 억울한 심정이 들더라도 그 업을 갚은 것이라 한다면 一末의 위안이 될 것이나 그 애지중지하던 희생된 것은 뭣이란 말인가? 너의 허물을 심도깊게 해서 가슴아프게 벗겨주는 (너도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으니까?…)보살이었나니라。이것은 번복이라도 번복아닌 것으로 보이는 一相이니 지금 現상태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그 어미를 何理由로 즐겁게 하였다 도 또한 마찬가지 현상이 인다 할 것이다。(또 의문이 생기길) 하필 보살行이라면 왜 ᆢ가슴아프게만 꼭 할 것인가? 좋은 면으로 보여주면 안될게 뭐있는가? 그 業이 그 옷이 되었다고 그 옷의 用途를 달리하는 융통모색은 없는가? 꼭 生 羊가죽 뻗기듯이 해야지만 해탈이 되어 해탈논리의 가치를 살린단 말인가? 諸象이 諸象의 옷을 입은 것은 그 效用을 살리기 위해서이거늘 그 業이 옷이 되었다해서 그대로 벗으라 말라는 法文이 또 어디있는가? 이것은 요주고슬이다.이것은 한 곳에 포로로 잡힌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구애되지 말고 그(그러한 생각을 것을 떨쳐내라하는 것이니 과현래의 심축이라하는 것이 어느 한것에 매여 구애된 바 없기 때문이다. 주저하지 말고 진취적으로 행함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 말씀이다.(이것이 떳떳치 못한 허물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은 또 인다 할 것이다。) 또 한 생각은 그 업에 의한 조성되는 여건이 그러하니 어쩔수 없다 할 것이나 절대적인 것처럼 유혹하더라도 하지않으면 상대적인 것이 되어 물고 늘어지지 않을 것 아닌가? 마구 심적인 목을 조여와도 애처럽게 발버둥쳐 그 의도하는대로 따라 줄 것이 아니라 그냥 죽어주면 어떨것인가? (이것은 보살관점이다) 그것이 또한 이래도 저래도 의도하는대로가 될 것인가? 저 ᆢㅡ 고기 떼를 포획하려드는데 잡히는 것도 의도하는대로요 도망가는 것도 의도하는대로인가?…그렇담、상대적인 것도 절대적인 것에 귀착된다 할 것이니 이래도 저래도 깨뜨림이니 그 요량에 있을 따름이니 그 좋다하는 쪽으로 치우치면 어떨 것인가? 그 大衆이

그런 것은 가슴아픈 것이라 하는 꼴(해탈상=被造物 成事象相)을 짓지 말고ᆢ ᆢ

◎ 저 ᆢㅡㅡ 미약하게 보이는 것도 보살행을 펴겠다고(西氏論은 牧者의 모습을 보이겠다고) 길에 나섰다면 한참이라도 잠자코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보살行이 될 것이라 하나 계속 역겁게 굴면 파고들 틈새를 보인것처럼 보이는 듣는 이의 허물이라 말하는 이의 心性이 싫어하는 상황이 조성되니 듣는 이가 오역한 냄새를 풍기어 反感相을 지어서 어찌 멀리 떨어지고자 않으랴? 지루하고 역겹고 권태 싫증이나면 精神相의 그런 모습을 대변하는 육신이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는 新陳代謝가 오역한 냄새를 풍기게되는 것이다。그보살行을 펴는 것을 보면(大衆을 상대로 하는 것이므로 평등원칙에 의거해 法相을 중간을 채택한다 하더라도) 어느 수준인가를 판별 지어지니 중점적으로 상대할 대상자의 겉모습만 보고 대상 근기의 측정을 판단착오를 일으켰담 몰라도 뱁새가 봉황더러 제걸음으로 걸으라곤 가르치지 못할 것이다。이렇게 자기 역량이 부족한 것을 가지고 엉성한 올가미를 가지고 멧돼지를 잡을려는 것 처럼 한다면야 되려 안다치게 하는 것이 온순한 멧돼지인 줄 알아야 할 것이니 가르칠 대상체가 배가 불러서 아무런 생각이 없고 끝내는 타락된 모습을 띤 걸로 보여서 구역질나는 냄새만 풍기니 따라가 봐도 별 볼 일이 없게 느껴지게하여 미련없이 헤어 지게만 한다 할 것이다.

생각하길: ᆢ ᆢㅡㅡ 계란이 바위더러 하는 말이 왜ᆢ ᆢㅡ 부딪혔는데도 나는 깨지고 너는 깨지지 않는거냐? 하는거와 같음이라

이른바 제 의도에 포섭 당하면 만족스럽게 느끼고 포섭 당하지 않으면 성에 안 차는 태도를 짓는 것은 아직 많이 修行해야 할 未達者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새끼 뱀이 황소 개구리를 먹고자 한다면야 그게 어데

제대로 먹혀들겠는가? 되려 안잡혀 먹는 것 만으로도 다행보살로 여겨야지.ᆢㅡㅡ 되려 이쪽이 그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줄 것이다.

◎ 나는 信奉하는게 없다。굳이 말하라면 힘이다. 힘을 신봉한다.그럼 힘이란 뭣인가? 그것은 자기하는 것에 관심있는 모든 이가 의도하고 지칭하는 끝에다 힘력(力)字를 붙히면 바로 그것이라 할 것이다.一切의 指稱끝에다 力字를 붙히면 그것이 그 앞에 뜻하는 바 들을 받들어주고 밀어주고 등 의지케하는 힘인 것이다。어떠한 사상을 주장하는 그 누구라도 나의 말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그러므로 力을 우상 신격화하여 그에 아첨해야한다 할것이니 만약에 굽히지 않으면 요절박살을 낼 것이니 어찌 가만히 나벼둘것인가? 힘의 세기가 시공을 뒤엎으면 諸어떤 것도 꼼짝못할 것이니 지옥같은 꺼리는 것도 파괴되고 극락같은 사로잡는 것도 무너뜨리니 힘이 세면 그 어떤 無量相의 祖上보다 무량곱으로 높을 것이다。힘은 어떠한 형상이 필요없으니 무자비한 폭력이라도 시공천하를 평정하면 으뜸으로 추앙받는 것이 되는 것이다。평정하고 난 다음엔 항상 전전긍긍해 갖고 있어 의심내기를 말지 않을 것이니 모반의 싹이 보인다 할것 같으면 미리 그 싹을 싹둑 잘라 없앨 것이고 모반의 싹이 없더라도 유도시켜 속성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를 보아 모반의 싹을 만든다음 싹뚝 자르는 것을 일과로 삼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마당을 깨끗이 쓸은거와 같아 모반의 기미가 전혀없을 것이다。그렇더라도 항상 마음을 놓지말고、 잠자지말고 눈이 충혈되도록지키고 있을 것이니 그 앞에 얼씬거리고 남아나는게 없을 것이다.누가 있어 감히 대적하겠는가 이 말이다。

以上論의 의미를 뒤집어서 감화시키는 방법도 이러한 논리를 취택한다면 모든 이가 세뇌 되어 의도대로

순응할 것이니 反逆相이 나타날리 없으리라 서석의 양대산맥이 천하를 뒤덮는다 하더라도 나는 송곳이 되어 그 막을 뚫으리니 절대순응치 않으리라. 왜냐? 나는 그 어떤 지칭하는 軸(神)佛天時空以前의 無爲有動 桓氏의 후예이며 그 一身 樣象으로써 계속 날이 있는 것과 같음으로써 순응이 있다면 그것은 헛상 폭력으로 보이는 것에 잠깐 굽히는 시늉을 지어보였을 뿐이리라.상황 따라서는 먹이體는 해탈맛 보임이 아니라 힘이 질쪄서 먹이가 된 것이다.그래서 힘이 없는 것은 먹이체가 영향상태가 없는 것 같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할 것이다. 귀신 무리가 내 말을 헐뜯어서 그에다 풍선 바람넣듯 영향力을 불어넣으면 하지만 그렇다. 그것까지도 환씨 양상은 생각하고 있고 너가 그럴 것 까지도 그렇지 않을 것까지도 짐작하고 있다하리로다.

反逆相힘(力=에너지)이란 뜻인가?

지금 이렇게 흐르는 상태가 順相 에너지의 作用에 의한 것이라면 그 反逆相 에너지의 作用은 없을 것인가? 이 反逆 에너지가 나와야지만 여지껏 生理를 위하여 저질러졌던 諸亂魔相의 作害를 짓는 것은 消滅된다 할 것이다。그 反逆相 에너지란 어떤 모습과 作動行을 말하느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꺼꾸로 하면서(되물리면서) 힘을 내는 것이다。(지금 動作이 前進을 뜻하는 것이라면 뒷걸음질 치면서 내는 힘을 말한다.) 이른바 원동기 原理는 諸與件具備된 폭발에 의해 힘을 내는데 그것은 기계具造와 기름과 공기 압력과 火氣와 폭발이란 수순을 밟아 일산화탄소를 만드는 과정에서 내는 힘이라면 그 逆作用이 이는 기계를 만들어 일산화탄소를 넣고 폭발을 잡아 그 以前으로 돌리고 공기와 火의 性도 그 以前으로 돌리고 압력도 그 以前으로 돌린다면 기름과 산소 등 여건 구비된 원위치로 돌아온다 할 것이다。이 互中에 逆相에

너지는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핵분열만 아니라 핵융합이 이와 같은 논리인진 알 수 없으나 소위 입에서 숨을 내뿜을 때만 바람이란 에너지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숨을 들여마실 때에도 바람이란 에너지는 인다는 것이다。내가 주장하는 에너지는 無害에너지이니 水火같아도 水火아니요、電氣같아도 전기아니요、一切가 順相動作行爲에 일어나는 諸모습의 모습이 아니요(이를테면 나무가 일산화탄소를 걷어들여 그 나무는 다른 영향을 만들어 내어 다른 것에 영향을 끼치듯 이렇게 순환하는 가운데 모든 삼라만물과 자연생태계와 그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모든 난마상해(害)가 맞물리듯 존재한다는 論理 이러한 것이 아니란 뜻)그 아니나 그 힘은 그보다 몇갑절 쓰는 것이요 무해하기 몇 만볼트의 전기를 사람이 전류가 흐르는 역할로 만져도 아무런 감도가 와닿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나는 이것을 초전도로 여겼는데) 지금 과학은 엉뚱한 것을 초전도현상이 인다하니 도통 어리석은 생각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 수 없어 답답할 뿐이로다。좌우지간 어떠한 경우이던간 無害하고 그 힘을 하염없이 내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항상 나는 그대로 여기 서있지만 절로 내 손은 저 바퀴를 하염없이 돌려 그 힘을 얻는거와 같음을 말하는 것이니 그렇게 생긴 모습이나 그 돌아가는 작용도 모든 것에게 爲害를 끼치지 않고 그에서 나오는 힘도 위해가 없고 하품하듯 염증 권태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라면 청정해 쓰레기 없는 에너지라 할 것이다.어거지 같지만 지금의 순작동에 의해 파생되었던 모든 作害짓던 要因은 되들어가고 새로운 에너지 나오는 것은 누구나 염원하는 것이고 그 서로의 염원으로 인하여 모순된 점이나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거나 一切의 邪相이나 邪念觀이 일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西賊이 所願成就란 것을 갖고서 사람들을 노예로 삼고 있도다。저에게 순응치 않으면 먹이감으로 여

기고 이렇게 넘겨 짚으면 사람들의 보는 눈이 있으니까 솔직하게 魔性을 드러내 보이질 못하고 어떻게 자기가 한 것이 아닌 것처럼 골탕을 먹일 궁리를 한다.소위 남의 손을 빌려(借刀殺人) 들고 치고자한다。李家시켜 술먹게하고 취한 맛은 金氏 제가 보는 것 같음이니 병될 건 남이 하게하고 약의 효과는 제가 얻겠다는 것이니 어찌 간교한 도적이라 아니하랴? 이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여기서 西賊이라함은 해가 自然에 理治에 의해 西에 먹히듯 논리적이나 그 무엇이든 먹어버림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이 또한 해탈맛 보임의 성취의 관점과 차별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겠거니와 그 솔직하지 못함을 고운 눈으로 볼 수 없어서 하는 말이다) 해가 저절로 굴러가 저ᆢ 쓰임새 화복이 되듯 차린 성찬상이 입에 가까이 닥아오는데 입다물고 가만 있다면 이 또한 허실낭비가 아닌가? 할 것인가? 남이 살려고 먹는 방법을 치사하게 물고 늘어진다 할 것이나 (서씨는 해를 먹어 항상 西意味로 사는 것이다) 귀신이 세상보기를 그 병든 먹이체로 여기는게 십상이라 이 그릇된 관점을 파괴 해치우는것이 나의 목적이다 (※ 지금 나의 집필이 시들해져 치매에 걸려있듯 되도 않는 뜻을 늘어놓고 있도다)

一切 꼬득이는 말에 넘어가지 말라!

그 유혹하는 말은 甘味로운 으로 나타난다. 너가 보살심을 크게 하여 자발적으로 베풀겠다면 물라도 일체 꼬득이는 자에게 넘어가 꼬득이는 자를 살찌우지 말라! 꼬득이는 자의 목적은 너를 꾀이여 먹이를 삼고자 함에 있으니 네 實利를 빼앗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꼬득이는 자는 너가 생색아닌 생색으로 보이는 진심行爲라 하는 (※ 진심없기 때문에 진심행위라 하는= 이라 한다 왜냐? 속심은 無爲有動이라, 수 없음으로 이미 가치라 현상한 것은 그 가치라 한 것의 겉껍질에 불과한 것 임으로서니라 가운

치 그러하니까 겉껍질상이 그러하다 한다면 진심이라하여도 된다 할 것이나 어딘가 미흡한 점이 있을 것같으니 왜냐하면 外見上 껍질이란 거짓이란 편견이 일기때문이다。內外가 그(어느것을 쓰는 가하는) 用度나 감칠 맛에 따라 眞僞의 相을 달리한다 할 것이다。속심이 또한 진심이 아닌게 많을 수도 있으며, 진심없는 것이다。진심있는 체 爲行하여 과로로 밭두둑에 쓰러져 脫破하는 것이지…)) 것으로 하는 보시 마음 마저도 빼앗아가 그리 못하게 하나니 아주 깔아뭉게듯 너는 그럴 위치에 있지 않다하는 ((네껏을 너가 주어 공덕쌓는게 우리에겐 생색내는 것으로 보이니까? 마땅히 그렇게 못하게하여 생색업보 쌓이기 以前에우리가 훔쳐와 네게 속쓰린 業報相을 심어주겠다는 것 왜냐하면 너도 그러했을 것이라는 넘겨짚는 귀신의 어리석은 作態、소위 제껏 제가 생색 공덕 심어주지 않고 찾아가겠다는 것이니 이것은 未達한 귀신이 立場의 번복을(이대로 현상유지해 연게동작지어 흐르는 相=이것도 또한 어폐와 모순 갈등상이 이니 이 모든相이 연계동작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깨닫지 못하고 하는 수작인 것이다))。그 보시코자 하는 地位가그 어느 것보다 上으로 보인다면 (그 보살심을 일으킬 꺼리(件) 물질이면 물질、깨달음이면 깨달음의 法相體) 그 上의 地位를 빼앗는 것 같이 할 것이다。제(귀신)보기에 ((저는 어떻게 보는가? 곧 空相으로 보니 저와이 對應 心象의 發露와 현황을 갖고 본다。

그마음이 어떻게 돌아가고 생각이 어떻게 흐르는지 氣感과 같은게 나타난 다할 것이니 쉽게 말해서 사람의 심상을 들여다 본다는 것이다。들여다 본다는 것은 귀신이 사람의 心象化하여 직접 그렇게 느껴본다는 것이니 이것이 허공중에 각인되듯 소멸되지 않고 있다가 그것을 소멸시키는 (종이말듯)業報 동작이 있은 다음이라야 지우개로 지우듯 소멸된다는 것이다) )도적질 하듯해서 속쓰린 利를 챙긴 것으로 보이는 것은 그것을 갖고 베풀려하며는 그리 못하게 하고 도적질하듯 속쓰리게 해 利를 챙겨가져간다는 것이니 그

것은 귀신의 어리석은 보는 相의 作亂이지 요즈음의 엄청난 몇百千萬곱절의 부가가치는 (제가 알고나면 어떻게 정당화 개념으로 볼것인가?) 생각치 못하는 혼자만 각성佛입네하는 未達한 작태임인 것이다. 그 귀신은 사람을 수족으로 부린다。그리고 그 수족된 사람은 갖은 경건한 모습을 짓고 作禮行動을 취한다.

◎ 하필 西氏論理만 창조하나님 논리가 아니다.우리式(우리의 마음과 행동에 의한 思想 우리말씀 用語우리業의 從事 모든 우리껏)대로 하나님 찾는 方法을 연구해서 하나님과 같이 한다면 그것이 어찌 西歐사상이라 할 것인가? 기존의 토속신앙도 그 으뜸神이 있을 것이거늘 우리가 그를 창조 하나님으로 모시듯 한다면야 안될게 뭐 있는가 이말이다。각 민족마다 고유한 토속신앙은 존재할 것이니 그것이 어찌 하나님 믿는 方法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꼭 西式대로 하여야만 하나님 찾는 方法인가? 내 그들의 我執을보니 敬愛하려던 마음이 들다가도 魔象이 씌운 것인냥 뒤틀리니 그 잘난체하는 모습이 싫어서일 것이니 언젠가는 저 견고한 듯한 백층의 건물도 무너지고 화려한 꾸밈도 낡아질 것이거늘 굳이 영원할 것있다 할 것 있겠는가?

필자가 많이 배웠음 그 많이 배운만큼의 표현을 어렵게 하여 보통平根의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들만 늘어놓아 되려 무슨말을 하는 것인지 도통알수 없을 것임으로 그 보통 사람들이 알아듣게 하기 위하여 이만큼 이정도로써 생각하고 표현방법을 이루게하였는지 모른다。이것이 學務가 不成해서 知識을 쌓지 못한데 대한 自己변명의 合理化라 할 것이다(平根이란 平常人의 마음생각에 새겨(刻)지는 理解力이

平常人이 이해치 못하는 말을 한다면 무슨 소용이 크게 있겠는가?)

또 이것이 自知識이 不足해 제대로 辨濟치 못하는 것을 그 잘난 행세하는 자들을 헐뜯는 것이 아닌가다면 그런게아니라 그러지말고 그렇게 어려운 말 쓰지말고 우리도 좀 알아듣게 말하라는 뜻이겠다.

여럿이 이해하지 못하는 用語나 뜻은 이상야릇하게 꾸민 외로운 등불이 모든 어두움을 독단적으로 밝히려드는 것같아「고것참 (생김생김이 어떻게 이렇게 생겼담 형형색색으로 빛을 발해 아름답긴한데 알다가도 모를일일세」하곤 이상하게만 여겨질뿐 그 孤燈이란걸 면치 못하고 누구의 마음이던간 그 마음의 그릇따라 이해시키는건 모든 등잔에 불을 밝히는 거와 같아 모든 어두움의 심도가 엷어진다 할 것이다. 그 마음의 그릇(器) 따라 이해시킨다는건 차등의 말을 수다하게 함만에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의 말이라도 그 받아들이는 그릇의 如何에 따라 이해의 다양성을 띈다는 것이니 이것이 또한 여러말을 하여 듣는 이들로 하여금 정신을 교란시키는 것보단 낳은 方法이라 할 것이다。공을 이쪽으로 떠넘긴다고만 할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찮은가 이말이다。그래서 一言이라도 저구름이 석양에 색색한 노을을 일으키듯 똑똑하게하여 잘알아듣게시리 하라는 것이다.

○ 그 껍질을 벗다보면 또 다른 껍질을 쓰게 된다.이것이 번복된 현상이니 어떠한 굴름이 自體的으로 굴러 간다는 것이나 그것이 굴름자국을 남기던 안남기던 껍질의 형태를 띄였지만 말이 껍질의 형태이지 껍질의 성격만 띄는게 아니라는 것이다。그 껍질이란것은 다른 모습으로도 조명해 볼 수도 있으니 그 껍질을 여지껏 쌓은 業積으로써 그것이 障害를 일으킨다고 표현한다면 그업장을 벗는다고 움직이는 여러상황 전개가 또 다른 業障이 된다는 것이니 이것이 연속성을 띄게되므로 굴르는바퀴 흡인력이 일어나는 것처

럼 되려 다른걸 빨아들이고자 할지언정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이것이 一方向의 作用을 말한것같으나 그게 아닌 것이다(물론 一方向의 作用도 있을 수 있다) 뒤집히는 전도의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뒤집히는 전도의 개념이란 어떻게든 되려 나옴을 뜻함만이 아니라 有相에 應하는 無相의 개념도 전도의 개념이니 이른바 有相이 오므라들다 못해 사라지면 無相의 모습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無相 또한 영원할 수 없는 法 그 영원하다한다면 아무리 사용하여 낡아서 그렇다 하기로서니 저 전구가 빛을 발하다 왜 망가지겠는가? 오래도록 초지일관 변치않고 빛을 발해야 할 것아닌가? 無相이 영원할 수없어 전구가 나가는 것처럼 無相이 낡다고 표현치 않더라도 自性에 의해 有相의 微塵이 어리게 돼 있는 것이니 內外原因을 캘수없는 것이다。以上의 業障의 벗어날 수 없다는 논리 또한 편견이니 벗어날수 있다는 쪽으로생각을 기울기면 그러한 논리전개가 일어난다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벗어날 수없다로 관점을 기울겼으니 벗어날수 없다는 논리로 계속 전개해보기로 하는데 그러므로 업장을 벗어남(해탈)은 없다。만일 누가 가진 것을 다 내놓고 걸림없는 마음을 갖고 걸식을 하다 숨이 다해 그 몸을 필요한이에게 보시한다하더라도 그것이 또한 그러한 업장(겉껍질 양상)이 되어 그 벗기위한 그를 벗을만한 여러상황 전개의 업장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악업을 쌓으면 악업을 벗기 위한 反相이 앞의 因緣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이니 惡에 反相은 善相이니 善相은 쉽게 거져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고통을 수반하는 그에 相應(반응이 될 만한할 만한 어려운 노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반면 善業의 업장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혜택을 누리게 되는데 그것은 묵은 양식과 같은 것이나 누리는 것이 果報性만 띄는 것이 아니라 惡業을 쌓게 되는 因果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즉 악업을 쌓아 그

의 옷을 걸치는 결과가된다는 것이니 향응을 받음은 그 향응이 있기 위한 여러여건이 (하는이가 설령 달가운 마음을 가지고 한다하더라도) 고달게 수고하였다는 것이니 그것이 업장이되어 다시 갚는 윤회에 든다는 것이다。(※ 甘苦는 보는 이의 시각의 척도에 달렸다고 번뇌는 말하고 있다) 또 以上의 말이 치우친 短편견이요 深長的見解는 하필 그렇치만도 않다는 것이니 남이 살려고 지은 집에도 내가 살 형편이 되어 내가 살기도 해 전월세가 있는데 구분짓고 적응하는 논리가 반드시 그런것만은 아닌것이니 보지 못한것을 억측치말고 一切未知의 염려를 떨쳐내고 그것이 衆地觀에 善觀으로 여기는 것이라면 初志一貫一路邁進하라는 것이니 사사롭게 拘礙될게 없다는 것이다。저 모든이를 위하여 大路를 닦는데 울퉁불퉁하고 험난한 땅을 평탄하게 고르는데 귀신걸고 넘어지는 그까짓 바위돌 하나쯤 치웠다해서 악업장을 쌓았다고 구애될게 없다는 것이다.그 귀신걸고 넘어지는것 모순이나 反相의 번민생각)이 되려 그저의 이렇다하는 고뇌도 한몫끼어 벗기위한 모습으로써 달가워하는 표정을 그렇게 지어보이는 것일지언정 實相없지만 實相 情은 아닐것이라하는 生覺은 생각이 곧 중생이요 중생의 念觀이 곧 파괴된 佛性覺이라 저 고뇌하는 衆生相을 벗겨준 것이라 실로 구애될게 없다는 것이니 大를 위해 自我라하는 小를 희생하는 것은 무애보살이 세상에 있으면서 모든이를 위하여 보리도를 펴는것과 같음이라 自己가 저 깊은 계곡에 외나무다리가 되어 (주제넘게도 외나무다리가 된다고 비아냥거리는 모습이지만 또 안 될게 뭐있는가 이말이다。용기없는자의 야유하는 부끄러운 모습지음과 생각은 내게는 끌어올리는 동아줄로 여겨질뿐이다) 많은 사람을 건너게 하고 저가 그 계곡에 떨어진다한들 그것이 지옥으로 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또 그것이 불지옥이라 하더라도 선택은 正觀(아닌 힘관=왜 정관이라 하였다가 힘관이라 하였는가? 그것은 세력에 의해 正이 결정된다는 것이다)에 의함이었으니 지옥의 불기운 귀신이 되려 구제받으려고 돕고자할지언정 먹고자 않을 것

이요 그 먹고자않는 것이 설령 먹는 것이라 하더라도 참보살이 우리(불귀신)를 구함으로 여길 것이니 모든 지옥의 고통이 파훼되어 극락化될 것이다。극락化는 무궁화가 연달아 피는 것처럼 그러한 현상이라 끊임없이 피고지어 전체의 늪이 꽃밭을 이룬다는 것이다。그것은 땅이던 하늘이던 뿌리 한 곳이 있지 거져 이유없이 피지않는 것이니 그 뿌리한 곳이 어느 一定한 땅이라곤 할 수 없는 것이니 편견을 일으켜 正見이라 하지말라는 것이다.모든 편견속에 꽃이 피는 것이지 그 뿌리가 한끈에 붙었다 따로 떨어졌다 구분지어 장단의 잣대를 들여 밀지말라는 것도 아니요 들여밀라는 것도 아니니 상황요량은 제비뚤은 심사에 달렸다는 것이다.

너가 (알던 모르던) 속아서 주의 利得을 챙겨준다면 알던 모르던 萬의 속음 받음이 와서 너의 利得챙김이 될 것이다。그 實利를 챙길만한 여건이 조성되어 그러할 것이니 그것을 갖고 옳으니 그르니 할게 없는 것이다。반대로 그 實利를 챙겨주지 않을만한 여건이 조성되어 實利를 챙겨주지 않는것 또한 같은 논리라할 것이다。이렇게 숙명적인 것들을 편견에 의하여 사실이 꼭 그런 것처럼 말하여 사람의 정신을 교란시키니 흡사 모르는 것이라 하고 먹는 떡 덩어리를 저바위 위에 놓고가니 그 바위가 利得을 어떻게 챙긴 단 말인가 하는것과 같음이니 事情이 통치않는데는 이해득실도 잘 통치 않을 것이니 누가 그 떡을 와서 먹길 바라지말고 직접 먹을자를 찾아 나서줌이 어떠하랴? 授受去來속에 모든 인연은 일어나 화복이라 하는 것을 짓게 되는 것이니 그利得챙길만한 자에게 알아들을만한 자에게) 그리로 가면 함정있고 꽃밭 연회床(狀)있다 말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