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鬼神의 어리석음
모든 사상과 主義가 삿된 정신의 관념을 통하여 眞理化하여 저마다 임금하고자 한다.어떠한 甘福되게 보이는 想念의 유혹에 의한 책략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평등을 부르는 사상이라도 그것을 내세워 如他理念과 主義를 그만 못한 것으로 눌러 종삼아 저를 떠받들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그 아무것이가 볼 적엔 어리석다는 뜻이다.
또 그러한 것을 모르는체 그냥 넘어가지 않고 신랄하게 비판을 가하여 꼬치꼬치캐듯 발각시켜 헤집어놓은 심사는 또 뭐란말인가? 남의 그런 世態되어 돌아감에 보조를 맞추는 것을 헐뜯는 듯한 논리를 전개하는자 또한 옳은 상념을 그리는 人格者라고 볼 수없다 할 것이다.그 어떠한 사상을 추종하는 이는 그것이 생활에 유익한 것이고 스스로의 정신관념에 맞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그러나 그러한 것※ 이런 뜻이 그러한 것에 해당하는지 모르겠다… 意志의 德、믿음의 德、威信力에 의한 혜택 등 그外 여러 가지 가피 恩典 등)이 가치와 기준을 어디에다 뒀는지 참으로 의심스러울 뿐이다(그래서 그런지 안 그런지를 뭘로 판단한단 말인가? 力量에 맞는 이뤄질만한 조건을 걸고 (※ 이뤄질만한 것은 그 믿지 아니해도 이뤄질지 누가 알겠는가? 믿지 않는다고 악마의 발톱을 풀어 놓아 할퀴듯하여 파토를 일으킬 것인가? 아님 너는 너고 나는 나라고 관여치 않을 것인가? 먹음직스런 體 그 관여로 인하여 깨뜨릴 體、사로잡을 體의 성질이라면 반드시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라°) 그 與否를 갖고 아니면 허무맹랑한 것처럼 보이는 조건을 걸어 봄인가? 이 모두 삿된 귀신의 얽(理)는 능력을 보고자 함이 아니던가? 귀신의 능력을 보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뤄야 할 것이니 설령 억곱의 이득이 있더라도 이는 귀신의 농단조건에 걸린 것이니 有用을 종삼는다는 차원만 아니라 의탁하여 원고(寃苦)를 풀고자하는 자랑할 것 없는 行爲로써 부끄러워 할래기지 (바른 것은 없지만 그래도) 바른 깨뜨림은 아닌 것이다。조건에 대한 반사이익은 점점 부풀린 조건의 덩치를 요구하게 됨으로 (그렇지 않으면 조건은 퇴색되고 자극받지 않는다 또 배부른 다음 산해진미는 행동의 게으름을 낳는다。즉 요구에 잘 응해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쥐어짜다 못해 깨묵처럼되고 타들어가는 大地는 비를 바랄 기약이 있지만 이것은 기약도 없어 그 삿되고 거짓됨을 판결받게 되는 것이니 열심히 일한 前功을 쭉정이 취급하는 건 뭣하지만 해탈 맛은 이미 먹어치웠고 변질된 그를 원하는 他의 먹이 거름이 될 맛만 남았다 할 것이다。이것이 낙엽귀근이라 해서 그 근본으로 돌아간다하나 그래서 空相의 순환法則에 순응한다하나 다음단계의 시절(새 이상)이 닥아옴에 도태된다는 것이다.)
귀신도 여러 가지 相으로 관찰할 수 있으니 이 중 어떤 귀신들은 힘의 축적 즉, 시간이 경과되야지만 또다시 힘을 발휘할 수 있지 힘쓰고 난 다음 금새 또다시 능력을 보이라고 조건을 건다고 능력을 보이는건 아닐 것이다。이것은 배곯은 이에게 싫컷먹게 한 다음에 음식을 또 차려놓고 먹으라 하는거와 같아 흥미없어 하는게 놀이 마당에 들어가 춤추고자 않고 먼발치서 장단만 치는거와 같다 할 것이다。연신 금나와라 뚝딱 하는 도깨비방망이나 계속나오는 소금맷돌은 이야기나 있을 法한 얘기요 (其實은 공장제품도 그렇게 나오긴 하나)계속 쉬지 않고 요구사항을 그렇게 들어줄 귀신은 드물 것이다.(물론 공장기계야 윤활유만 치면 지칠줄 모르고 돌아간다 할 것이나 귀신이 싫증내고 지치지 않는다고 무엇을 갖고 확증을 잡을 것인가?) 이것을 어째 그런지를 잘아는가? 한다면 한마디로 말해서 억측 지레 짐작이니 요행히도 맞히는 수가 있으니 왜냐? 내 마음이 너의 마음이기 때문이다。너가 나의 意中을 읽고 있어 내 마음을 갖고 너의 읽은 바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을 갖다 귀신이 사람의 心氣、心理에 편승한다 함인것이다。시간이 또한 귀신이니 여건이 조성되야 새로 비가 오는 것 같아 비온 다음 山野가 산뜻한 비옷을 입었는데 의외의 여름날 장마철과 같음이 아닌 다음에야 금새 또 귀신을 청한다고 조성된 여건 즉 아무런 준비도 없는데 맑게 개인 창천하늘에 비올턱이 있겠는가? (혹 귀신의 조화로써 물 뿌리듯 하는 수도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되야 구름이 피어나서 큰 구름을 만든 다음 비를 내리게 됨인 것이다。각중에(갑자기) 비가 오길 바란다면 천둥번개 소나기성 비나 혹 나릴런지 모르리라。사람 끼니마다 귀신은 오지 않는다. 정상치 귀신은 올바른 사람과 같아 不敬、不誠實한 것엔 거들떠보지도 않고 배고픈 추접한 귀신이 군침을 흘릴런지 모르리라°※ 아무 연관없는 귀신은 주위 시간적 배경상 거기 있을리 만무하고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면 친인척이나 평소에 알고 지내는 이웃사람、애、어른、벗님내에게 의지한 여러 靈相일것인데 추접으로 몬다는 것은 크나큰 過觀을 저질르는게 아닌가 한다)
귀신은 주지 않는 음식엔 흠향치 않고 먹던 음식엔 흠향치 않고 오직 수지것을 주는 것만 흠향하는지 모르리라 왜냐? 제가 탈상보다 먼저라해서 먼저 대접받길 원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떠한 나열할 만한 준칙이나 그것만이라 하는 이유가 있는건 아니다 귀신이 虛한 것이라서 數多次元無量이라 그저 이리해도 저리해도 귀신이기 때문이다。有感無感 世上 안이나 밖이나 되어 돌아가는 行은 모두 귀신이니 諸神殺과 각종 名分名稱의 귀신들인 것이다.
그렇게 하는 行爲(끼니때 하는 행위)는 如何한 合理性을 띈 이유의 행위라도 불경、불성실한 행위라고 한쪽편으로 기울은 삿된 정신 생각은 가르키고 있는 것이다。正觀、正相도 없지만 어떠한 흐름行이나 그 흐름을 타고 진행 또는 전개타 보면 한쪽 편의 손(手)을 들어 주게 되있는 것이다.또 이 글에 비오는 얘기도 꺼냈는데 그 비오는 방식 중엔 이러한 방식도 취한다. 즉 山野의 精氣가 日氣의 영향을 입어 水氣를 자아올려 高度、기압, 기온 등 제반 여건에 의 해 물 방울을 만든 다음 비가 오게되는 것이다。그대가 만일 산야의 精靈을 불러낼 재주를 가졌다면 능히 적시에 비를 내리게 하여 대기의 오염을 제거하고 메마른 곳에 신선한 생기를 불어넣으리라。
또 귀신의 조건에 넘어간 이들이 믿음 主體에 따라 그 眞僞力量이 다르다 할 것이나 극소수나 그 中에서도 七八이 해도해도 피폐해지는 것은 마약중독장이와 같아 약한 조건을 갖고 자극받지 않기때문에(이는 믿음의 조건이 식어서만이 아닌 것이다.) 점점 궁핍한 면으로 내몰리고 그에 매여 달리다시피하나 걸리적거리는 것으로 여겨 잘 해주지 않는 것이다.이를 도시 운명의 탓으로 돌리는 수가 많다。몇몇 선택된 사람만이 조건의 길을 가르키기 위해 세워 놓는 것이다。이것이 또한 한쪽으로 기울은 생각이니 다방면의 균형발전을 가져온 것이 무엇인가하는 의문점이 제기된다 할 것이다. 빈부귀천은 어느시대나 있는 몇몇의 빈천함을 보고 전체를 저울질할 순 없는 것이다.이것이 저마다 처한 입장마다 생각의 차이、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또 궁핍은 귀신이 계속 노복으로 부리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다.)
대체 발전이란 뭔가? 배 안 고파서 발전인가? 서양 문물 종삼아서 그 귀신 유혹사상에 현혹되어 시키는대로 하는 노복된 것이 발전인가? 더럽고 치사한 관점이 드는게 발전인가? 이것이 또 한쪽으로 기울은 생각 아닌가?
어떠한 기준을 정하거나 가치를 부여하거나 판단을 한다는 것은「그것이다! 하는 자신감을 세운 진리로써 삿됨이 지극한 格인 것이다。格을 세움은 갸웃(=얇팍한 책략이 섞인 기웃의 토속적인 의미、어구이다)거리는 엿보고자하는 (사시적인) 삿된 정신이 하는 것이나 빼어난(秀) 슬기로움 또한 隨伴하고 있음인 것이다.이러한 슬기 또한 삿됨을 도우는 간사한 작용을 할 뿐인 것이다。결단코 이러한 삿된 진리만 캐내려(發想、發覺)하고 추종하고 거론하길 즐긴다면 이에 발판을 둔 그 外것은 별 볼 것없다는 것이다。왜냐하면 흥미와 쾌락 등은 삿된 정신이「유익하다.즐거웁다. 좋다 등 하는 판단이지 폭력을 加하여 때려죽이고 지근지근 밟아 고통스럽게 해주는 것이 옳다한다면 그것이 옳고 유익한 바른 깨뜨림인지 누가 있어 그렇지 않다。反論을 펼 것인가?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事理판단은 삿된 진리가 제 힘만 믿고 강압적 우격다짐으로 格을 세운 것으로써 이 아무것이는 그를 否定視하며 反對한다。왜? 특별한 이유가 달리 또 따로 없다. 앞서 설파한대로이니 이 아무리크소니기 때문이다. 또 鬼神 시류(時流)따라선 肯定的인 面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大意的으로 不定한다.그 아무것이 찌르고 죽이고 박살내고 作害하는 것을 그른 관점으로만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왜냐? 그것은 삿된 진리가 자기 판단의 편의위주로 格을 세워 그런 것을 그르다 하는 것이지 실제에 있어선그것이 그르다 하는 걸 누가 있어 한가롭게 증명해 보일 것인가?
(※ 예까지 쓰고 난 다음 한숨돌리기 위하여 휴식 곁눈질에 띄는 것이 뒤집힌 物件이 눈에 와 닿다)
이제 정신 감관이 어떻게 잘못되어 미쳐(狂)가고 있는 것이다) 그른(非) 관점이 아니기 때문에 먹기위해 찔러 고기를 잡는다.
佛氏가 말하는 보살이란 뜻이 諸相의 관점을(회한없는 욕구충족이나 大達한 깨뜨림(두둘겨 부심)으로 정신과 各 物事의 性格과 性質의 無碍함을 이룸에 의해) 벗어버리어 궁극에 가선 空相의 관점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필자의 지금도 미달이지만 더 미달한 관점、시각일적이었다。석씨는 제법 단멸을 空相으로 말하지 않았다.즉 空相은 諸法斷滅이 아니라 무애한 그릇(器)이란 뜻으로 이에서 諸現相을 收容한다는 뜻으로 흡사 마음은 눈으로 보이지 않아 모르는 것이고 굳이 모양을 말한다면 뜬공중과 같음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그 空相에 到達코자 하는 모든 일어나는 諸相의 관점에서 방편적인 行에 있어선 자기 닦음의 일환으로써 두루 구제한다는 뜻이 들어 있을 것이다。그렇담 세파에 찌들린 상인의 정신상태도 구제한다는 뜻도 들어 있을 것이다.오염된 정신에 새로운 바람(새 리상)을 불어넣는 것은 병들어 있는 정신을 씻은 듯이 낳게하는 活力素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됨인 것이다。새로운 개념은 旣存의 思考方式갖곤 着想해 낼 수 없다。기존 사고력을 기울겨냄 (정신을 깨끗하게 함)과 顚覆에 의해서만이 可能한 것이니 모든 관념을 反으로 돌려 거꾸로 뒤집어) 집어넣고 事物의 관찰을 새로운 尺度로 어봐야 할 것이다. 새로운 思想과 理念 表方은 大河의 뒷물결과 같아 구태의연한 앞물결을 들고친다. 그렇기 때문에 밀려남을 서러워하는 면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러함을 자랑스레 여긴다. 왜냐? 미련과 情의 고(罟)를 파괴해주기 때문이다.그래서 물러가면서도 걸림이 없게 되는 것이다.
◎ 그 때에 深醉破醒한 이가 있어 모든 진리와 邪와 惡이라 하는 格의 관점을 정립한 제반 首長들의 要求를 참으로 들어주시다 그가 獨白처럼「취성자는 무슨 취성자 멍텅구리 바보지」하듯 들어주다。그들은 제풀에 시들해져 물러가니 더큰 어려운 고(罟)를 미연에 防止하고 만복과 만덕을 萬有에 펼치심에 이 또한 성자의 크나큰 공덕과 은덕과 능력이 되다。격랑이 일면 아름다운 문체는 이룰지언정(이 또한 탈고의 일면도 있다)遲速과 높낮이에 시달리는 파고 그 자체와 그에 싸인 것들은 고해의 높일 뿐이다.
諸相에서 離緩된 醒者((말과 뜻이 제상에서 이완된 것이지 제상에서 이완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말(이론·의견 분분)이 있게 되는 것이다))는 그 걸레조각 같이 될 수도 있는 껍데기라도 먹이로 달라면 조건없이 아낌없이 주다(西理는 去來가 조건고리라 하였는가?) 그것은 앞서 빠져나온 거미母가 새끼들의 깨트림을 위하여 그 허물껍질옷을 먹이로 제공 하는 거와 같다。왜냐? 나는 빠져 나왔어도 나온것이 아니니 실로 나라는 관념을 갖게 하는 것이 있다면 빠져나오지 못한 相이 되기때문이다。諸흐름의 役事行 속에서 그것(모든 것 포함한 것)은 깨이고 발전된다。깨이고 발전되다보면 모든 걸리적거리는 것은 제위치를 찾아 투명성에 도달하게 된다°(이것이 또한 석씨의 환태비슷하게 되어 돌아갈 뿐이다。왜냐? 새로운 것이 있나하고 더 궁구해봐야 궁극엔 입장이 같아져 다른게 잡히질 않기 때문이다) 醒者께서는 그 醒이라는 조건에 걸려서 진리의 종되는 것도 마다않다。왜냐하면 아무리하여도 진리가 성자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이것은 여기서 문맥 흐름상 그렇게 말한 것이지 실제에 있어선 성자가 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렇더라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쾌락은 여러 희생을 요구하는 것처럼 저들의 어지러운 꿈의 덫펼침을 자제케하여 구심점 가까이 묶어놓기 위해서다.여러 희생은 그 많은 고(罟)와 같아 풀기만 점점 복잡해질 것이다。(또한 그런 속에서 일면의 발전이 온다고도 할지 모르겠다) 성자의 無爲한 저절로와 같은 되어 돌아가는 役事行이 眞理의 허스레떠는 役事와는 그 次元의 界가 다르다。진리가 표방하는 구제는 진리의 가증스런 얼굴이요.그 뒤에 숨어있는 음흉한 속셈을 누가 알 것인가? 참은 없지만 확증되어 있는 걸 보고 판단하길 참다운 구제는 조건지어 짐을 내세우는 진리가 함이 아니요、다 부숴져도 좋다하는 또 그根이 있고 없어지는 걸 거론코자 않는 그 아무것이 醒者가 함인 것이다. 일체 무엇이 되길바라는 相은 邪惡한 假相인 것이다。그 乞人이 醒者며 그 궂은 일이 성자며 그 꽃이 醒者며 그 맛있는 먹이가 성자이니 성자의 모습은 일정치 않아 셀 수 없어 셈없는 능력이다。성자는 그 어떤 것에라도 그 누구에게라도 제도하지 않나니 그 누구를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가르킨다면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성자는 관심 밖이나 그 진리가 고(罟)를 못풀어 이렇게 저렇게 시킴을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醒者는 아무런 가르킴이 없다。가르킨다는 것은 그 뜻을 가로막는 것이니 즉 제어시키고자 함이니(앞의 제어시킨다는 뜻 내용과 모순된 점이 없지 않으나 문장의 흐름상 그렇게 되어 돌아가는 것을 어찌 해 볼 도리없다.모순을 없앤다는 것이 점점 모순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진리體와 사탄 누구가 그대로 고분고분 따라 줄것인가? 괜스리 여름 날의 불쾌지수처럼 역정만 내고 반항심만 기르고 샛길이 없는가를 그리게 할 뿐이니 사탄도 그런 헛튼 시험은 하지 않을 텐데 하물며 일체 것에서 이완된 醒者께서 할 것인가?(이것은 정신감관이 佛씨의 영향을 받아 지금 그를 환태 비슷하게 그려가고 있는 것이다.이미 빨지 못하게 젖어있어 생각이 그리로 깊이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성자께서 열번을 빌었다 그 누구에겐 인지는 모르나 동서남북 하늘 땅 아무데나 대고 무수히도 빌다.그 저 잘되게 해주십사 하고 말이다。성자가 스스로 성자라고 다른 것들을 억누르지 않나니 가만히 있어도 如他가 스스로 놀림 당하는 것처럼 여기고 성자는 스스로 성자라 하지 않는데도 오직 여타가 가르켜 성자라하고 성자라 하다못해(삽살개 개굴창으로 막 내몰아재켜 무슨 이득을 취하려하듯) 귀신들려 광란하는 무리들처럼 우상을 만들고 어떨땐 절하고 어떨땐 욕지거리하고 침뱉고 (저와 아무 이해관련없는 저기 서있는 외로운 버들을 쌍도끼로 마구 찍어 재키듯 화풀이 비슷하게) 저마다들 그러함인 것이다. ※ 히스테리 부리는것 억눌리고 쌓였던 心의 압박의 해소차원 심신의 과로한(스트레스) 피로쌓임의 해소차원이라 할까… 성자가 어떨 때는 한없이 떠오를 것같은 풍선처럼 떠받들림을 받고 어떨땐 짓눌러서 깔아뭉게기가 발로 담배꽁초 비비듯함을 당한다。성자가 뭐라고 하였는가? 가만히 있는데도 如他가 말이다。가만히 있는 것도 꼴사납다고 왜 가만히 있느냐? 없어지지 않고 말이다 하는 식으로 是非를 걸다시피해서 나서는 것이다. 성자가 만약 그 자비광명이라는게 있는데도 그 자비광명이라는 것을 감춘 듯이하고 한없는 슬픈 표정을 짓고 말하길 내가 가면 어데로 갈건가? 의 셈없음이 돌아들면 自滅처럼 보이는 뒤집힘인 것을 너가 내 인줄 왜모르냐 함에 자비광명이라는게 있다면 그 짓는 모습이 如他의 모습에서 우러나고 빛나리라。자비광명이라는게 있다면 覺達化光일 것이니 일체 회한의 고를 벗었으니 여한없는 자태 다 떨쳐버린 모양을 짓는 그런 모습일 것이다。(그 모양 또한 가증스럼일 수도 있다)
○ 그 아무것이라 하는 醒者가 있다면 그 성자라 하는 이는 허황된 능력이라 하는 것을 말거나 行치 않을 것이다。그렇다고 무슨 다른 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아니다.보통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으론 무능력한 것으로 보일 것이니 내라는 진리된 자가 생각하는 그러한 능력이라는 次元의 界가 아니므로서니라 성자가 삿진리의 종되샤 그 삿된것이 영원히 난동할 것 같아도 그렇치 않다.또다른 주장 진리라는게 있어 귀신을 경문으로 막듯하여 제풀에 시들어져 체념만이 아니라 원
고가 풀어져) 사그라진다. 올해가 있음 다음해가 있듯 말이다. 어찌 그럴건가? 그것은 그쪽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다. 성자를 종삼았는데 그 능력없는 것이라는걸 갖고 그 진리가 영원할 것이다 한다면 그 주장 또한 그럴듯하니 너 주장하는 자 좋을 대로 생각하여라다。아무렴은 어떨까 그래서 아무것이 인것이다.
○ 서로가 서로를 먹고자 한다면 이것은 싸움하는 것 강한 자가 이기는 건 필연이다 뜯어말린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주위 조성된 상황이 필히 뜯어말려야 할 것이라면 뜯어말려야 할 것이다。그러나 여기선 문맥 흐름상 그렇게 결정지어 말해보는 것이다)만약상 스스로 지혜있는 자라해서 관여한다면 양편 모두에게 원망을 사기가 십상일 것이다.그러므로 관여치 않는게 상책이다。어떻게해서 그들이 설득당한다고 자신할 것인가? 그는 위압적인 힘을 갖고 누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할것이다.또 兵法의 모사처럼 지략을 쓴다하더라도 그러한 方法이 먹혀들지 안 먹혀들지가 의심스럽다 할 것이다. 필자가 이러한 뜻에 글을 쓸려는 것이 아니라 대등한 입장의 양편을 아무리 힘있는 자라도 어느 일편을 도와 편을 든다는 것은 다른 한편의 원망을 사므로 그 間에 끼어들기가 어렵다는 뜻이다.또 이러한 글을 쓸려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먹고자 한다면 그 아무것이의 대처방안은 무엇인가?이다.
代替도 필요없다한다면 속일 수 밖에 더 없지 않는가이다. 이것은 선의 방책은 아니더라도 궁도의 묘책은 될 수 있다 할것이니, 궁극적인 목적은 파괴에 있지 속임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무것이가 막다른 골목에 다달은 것이니 더 빠져 나갈 계책이 없다고 삿된 진리들이 無言에 박수소리를 내어 좋아라하는 象을 지을 것이나 그러나 그것은 삿진리들의 큰 착오이다。왜냐? 등장인물 배역、주연、줄거리없는 연극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가 꼬리를 원한다면 나도 꼬리를 너가 머리를 원한다면 나도 머리를 ᆢ恒常 먹으나 그 있나니라。서로의 생명 有無를 논할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니(※ 세력의 활동생명은 있을지라도 그 모양이나 동식물 등의 살아있다는 표현인 생명의 有無를 말하는 건 아니란 뜻이다) 흡사 조금있으면 폭발 폭탄을 가운데 두고 양인이 꼭 끌어안고 있으면 같이 죽을 건 필연적인 것 서로 먹고자 으르렁거리며 벼르고 있으나 조금이라도 思覺할 줄 아는 物이라면 제가 당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너가 내 꼬리부분을 먹으니 항상 너 꼬리가 있을 것이고 내가 너 꼬리를 먹으니 항상 내 꼬리가 있을 것이니 그것은※ 동식물류 등의 살아있다는 표현인) 死生의 차원을 떠난것 흐르는 유성처럼 말이다.
유성이 저 공간의 꼬리를 먹는다는 것을 스스로의 꼬리 먹힘을 보고 알 것이다.저 유성 공간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 또한 저 공간을 먹어치워 自化하였다는 것을 깨달으리라. 시간의 行態는 저 멀리가는 기다란 장대의 뜻을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役事하는 空化、形을 취하는 것이니 空化는 제 위치를 지켜 여러 변화의 모습으로 시간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아니다。네가 내 꼬리를 원한다면 나는 네 머리를 먹고자 원한다 한다면 어디한번 먹어봐라°네 뜻이 변경되어 간교함엔 내 뜻도 변화되어 대등한 대처방안을 강구하여 먹는 부분을 머리로 할 것이니 앞과 같은 뜻을 취한다면 입이 열개라도 너만이란 뜻의 獨食은 하지 못하리라。아니다。내 입은 꼬리에 있다한다면 입있는 곳을 머리로 관념을 둔 以上 중간에 변경한다 하여도 그런 것은 변경될 성질이 아닌 것이니 그게 어디 꼬리인가? 머리이지 할 것이다.아니다 내 입은 몸통사방 겉속 모두다 한다면 대등한 입장의 나(이쪽)를 대변한 것이니 패퇴하여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포로 사악한 진리여! 억지써서 같은 패퇴입장이 되게 하질마라!! 너가 나를 인정하는 것은 너의 영원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 명분이 너와 나일뿐 一身空化 頭尾가 없을 것이다라 하라°(※ 本文立案엔= 아뭍든 내가 네꼬리를 먹을려면 뒤집히던가 해서 먹을려하나 먹지 못하리라 (왜1?같이 뒤집히게 된다는 뜻이다) 하리로다。또 먹은 들이니 ᆢㅡ 너와 내가 함께 섞여 있어 두미를 분간치 못하리라 하라)로 되있다. 훗날 +釋類書에 보길 관점은 何位가 되던 성취관점이라는 것이니 승패의 뜻 편가름이 무의미함 인것이다.즉 전쟁에 패퇴해 포로 또는 소멸되더라도 견해나 立場을 달리해서、그것은 그런것이 아니라 갖고 있던 力量을 다 발휘한 것이라면 한 굴레를 벗은 한 토막을 마무리짓는 완성의 차원으로 봄인 것이다.
◎ 모순의 답은 모순이나니 그러므로 균형감당되어 모순이 있어도 이 없나니라.
그 칼을 칼치 · 배 반으로 가르듯 둘을 만들고 그 방패를 빈대떡 계를 일으키듯 한다면야 무엇이 어려우리 옛 사람이 금새 답이 궁하여 답변치 못하였을 뿐이로다。그 칼로 그 방패를 쳐 부러져도 부러지지 않은 것이 됨이요、그 방패로 그 칼을 막아서 쪼개져도 쪼개지지 않음이 되나니 왜냐하면 그 방패와그 칼이 또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또 요새 쓰는 컴퓨터 입력시스템이 이와 같아 그와 관련있는 자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이같은 方式을 취한다 한다.(※ 本文엔= 또 서로가 물고 늘어져 空이로다。네가
내 왼팔을 친다면 나 또한 너의 왼팔을 치리니 空인 것이다)로 되있다.
圖形 二
이것은 흐름이 축소되어 점으로 빨려듦을 나타내는 그림이다.또 그 반대 입장 흐름이 점으로부터 일어나는 현상을 그린 그림이기도 하다。점의 極大化 및 極小化가 宇宙의 現相 및 變化作用이다。점은 軸作用을 하고 諸軸의 集合이 宇宙인 것이다. 기계를 사용하여 초상화를 크게 그리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작은 글씨도 새긴다하니 이것은 지렛목을 축점으로 한 지렛대 양쪽 길이 長短에 의하여 움직이면 같은 角度현상이 일어나 그림의 大小가 결정되는 원리를 응용하여 그린다 할 것이다. ※ 필자의 잘 알지 못하는 추측일 뿐이다) 이러한 원리는 未知의 알 수 없는 점 저 쪽의 형태가 곧 이 쪽의 形態와 같은 面도 거꾸로 있다는 理論에 도달케된다 할 것이다 그 어떤 이론이던 간 절대성을 보장받는건 아니다。相當한 理由가 존재하는 한 유동적인 것이다。일예로 物體가 떨어지는 것은 重力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론이 창출된다면 그 前의 중력이론은 절대성을 보장받은 것이 아닌 것이 된다는 논리이다.그러므로 어떤 것이라도 영구불변은 없으니 時空形成 이론 또한 다른 차원으로 變化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 사탄이 그물을 펼침에 그 아무것이가 어찌 파괴(해원)의 魚로 걸림되지 않으리 그에 들던 안 들던은 내(※ 자신이 이렇다 함을 내세우는) 주장을 달리하는 다른 흐름에 달렸음이다.여기서 다른 흐름이란 남의 처지는 고려치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가르킴이다。또 如他를 자기만 못한 것으로 취급함을 말한다.
醒者의 그물이 혹 있다면 봉황의 뜻이 있겠지만(대략 사람들은 술수를 써서 현실 임시로 보는 感엔 나쁘게 보이는 것 또는 이해관계 있는 자가 어떠한 감정을 일으켜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逆方偏을 삼아 좋게 이루는 것을 봉황의 뜻에 비유하길 잘한다.모두 이 막힌 물고랑을 트기 위한 方案이라 病되다 할 것 없으나, 그 方案이라는게 들여다보이는 자에겐 그 과정들이 諸相들이
고(罟)를 풀고자 허덕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할 것이다. 마치 메말라 가는 진흙속에 물을 찾아 헤매는 미꾸라지들 처럼 말이다.)사탄의 그물은 그저 종이나 삼고 無知하고 次元이 낮은 것으로 취급하여 잡힌포로를 강제로 사역시키듯 제 식이 옳다고 제 方式을 注入시키기 위해서요 희롱거리로 여길 뿐이다. 소위 알 수 없어 두고 봐야 할 것을 제까짓게 하면서 뜻을 막는 걸림돌 노릇하길 즐긴다(이른바 放溢치 못하게 한다는 것은 그 무엇을 하고자 하는 자들의 뜻을 막는 결과를 가져온다)
저 싹이 凍土를 뚫고 蒼空을 보면 그 때엔 그 다아 내가 시련준 덕이라 한다。일은 아무것이가 하고 공덕은 삿된 끝이 차지함인 것이다。그 아무것이 성자의 用心이 한량이 없어 공덕을 사탄에게 돌리시나 슬기롭고 재치있는 사탄은 「그 다| 무능하고 나약해서 그럴듯한 핑계를 대는 것이요 모든 이룸은 다 내 능력이나니라 한다。이처럼 사탄과 성자는 그 역할이 견해(立場)가 다른 것으로 현상해 보여지는 것이다. ※ 좋은 날씨와 장날과 장소와 에워싼 구경꾼, 재주부리는 곰, 주인 등은 역할 분담만 달랐지 모다 위한
다는 보살관점이다. 이 모든 것이 조화와 균형미를 갖춘 것이라서 연극공연은 원할하게되어 유종의 美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설령 사나운 폭풍 등 불측한 방훼현상이 인다하더라도 그것은 그것대로의 現相의 연극되어 돌아가는 껍질모양 형태)인 것이다)
◎ 罪와 功과 罰과 賞은 사탄이 定立한 理論이지 醒者의 論은 아니다. 아무리 큰 次元을 해서 즉 경험과 깨달음을 얻게하기 위해서 한다고해도 그리하여 그것을 성자가 한 것처럼 꾸며도 사탄이 성자의 허울을 사칭한 것이지 성자가 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경험과 그 깨달음을 얻게하여 무엇할려고… 그렇게하여 성자 만드려고 아니다.그것은 그리하면 잘된다는 사탄관념의 유혹에 일부분일 뿐이다。사탄의 名分은 질서유지차원이나 作世論을 내걸고 있다.
죄의식을 느끼게 함도 사탄이 함이요 그런 일에 들게함도 사탄이 함이요 功과 賞을 얻어 희열에 들뜨게 함도 사탄이 함이다。「그것봐라- 그러길래 내가 뭐랬니」함도 사탄이 함이다.
(※ 일체의 모든 行이 사탄이 하는 것이라고 몰아붙치면 手足을 着梏으로 채우는 것과 같으리니 수족을 놀릴 바가 없으리라.그러나 사실이 그렇다고 한쪽으로 치우친 정신관념은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관념이 치우치지 않으면 아무런 생각이 없는 멍한 상태 空虛한 無氣한 상태다。그릇이 기울던가 담긴 것
이 가득해야지만 쏟아 흐르게 마련이다。쏟아 흘러야 刻形그림(圖)이 있게 되는 것이다.이것은 살아있다는 표현 욕망의 돌출, 웅지의 나래를 펴고자하는 胎動인 것이다。諸相이 이로부터 生成됨인 것이다.)
二、
성자는 갖은 시련과 어려움을 갖고 시험하여도 시원스런 해답을 내놓고 항복치 않고 그 位를 지켜 없어지지 않나니라. 사탄은 성자를 시험하긴 하되 성자이기 때문에 존경하고 그 行을 崇尙하여 모시며 사탄 제 스스로가 저자세를 취함인 것이다.이는 왜 그런가? 그가 성자이기 때문에 존경할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이 이미 박혀있어 무언가 확실하게 알순 없지만 다른 次元界가 있다는 걸 풍겨나오는 풍모를 보고 느껴서 알고 저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이거이 또한 덜된 말。그 뜻 내용의 구성면에 있어서 충분치 못함으로 되어 돌아감이 아니던가 하는 감이 든다.
성자라는게 하대(시험할)할 껍질을 썼다면 아직 벗지 못하였다는 것 벗기우는 시험받는 것은 당연한 것 성자라 할게 없는 것이다。무진의 성자라면 삿된 끝은 그 위엄에 눌려 감히 시험할 엄두도 내지 못하리라다만 가르침을 받고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그 시험처럼 보일수 있을 것이다.※ 거듭 말하건데 성자를 시험한다는 것은 스스로 풀지 못해 궁금해 해서
고(罟)가되어 있어 항상(꿍=응어리진 면)하고 있던 것을 시원한 풀음을 맛보는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이다
○ 혹이 필자에게 말하길 그대의 앞 모든 글이 旣存의 諸相(諸 主張의 思想理論相 및 그에 따른 行相)을 傲視하고 만 해서 철저하게 列外되어 있으면서 어떻게 해든 짬만있으면 파고들어 파훼해넘기려하는 악독과 증오에 가득찬 말로 일관하고 있어 논할 가치도 없다해도 할 말은 없다. 혹이 또한 말하길 꼭걸어 잠그었던 마음에 門을 열라 하나 이것을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피해의식 즉 뭔가 파고들 틈새를 보인 것으로 생각하고 (실제 또 그렇게들 파고든다) 또 나라는 自我를 무너뜨릴 책략으로 여기는 것이다.그러면서 짚히는 생각이 마음에 門을 열면 갇혀 있던 것은 자유를 얻을지 몰라도 그 마음집을 이룬 자신이 저들에 휩싸여 스스로를 잃을까 두렵기 때문에 또 스스로를 해치는 武毒도 될 수 있다.) 문을 열지 못하는 것이다 한다。 나를 잃는다는 것은 두려운 것 절에 간 색시 꿔다는 보릿자루 저들의 요리감、노복이 된다는 것이다。지금 내 생각이 치우쳐 있길(앞으론 또 어떻게 변할런지는 모른다) 악마의 王노릇을 할려고 노력할 지언정 악마의 王을 가마득히 내려다 본다고 꾀이는 저ㅡ삿된 진리를 주장하는 무리들의 주장에 넘어가 그들의 발치는 죽어도 되고싶지 않은 것이 내 심정인 것이다.
왜냐? 삿된 귀신에게 제압당해 조종받는 삿된 사귀 각(覺)이 이러한 생각이 짚히게해 제 수족으로 써먹을려 그러하는지도 모르지만 즉, 정신과 육신이 이러한 獄에 갇혀 있는지 모르고、또 하나는 나의 지금處地相이 그런 대접받지 못할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이는 또 왜ㅡ그렇게 처해 있는가? 一言해서 무능해서 위상을 높힐만한 것을 이뤄논 것이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그 위상을 높힐려고 이렇게 헛튼 수작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지난 성자하는 여러 聖人들께서도 天佑神助 등 神의 助佑를 말하고 그들과 合作해서 理想의 道를 펼침을 성공했는지는 몰라도 저들을 삿된 일종으로 모는 고집불통인 필자의 치우한 상념이 저들과의 휩쓸림을 싫어하고 내치고자 하는 마음만 가득해 찬그릇과 같이 해가지고 있으니 내 마음이 너 마음이라고 그 길을 꽉메운 장애물 더미가 되어 내 마음 먹은대로 될지가 의심스럽기만 할 뿐이다。※ 저| 거룩하다하는 一切의 자들이 삿된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 心이 삿된 끝에 제압당해 이런 필놀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일편의 생각이 또 들고 일어난다。一言해서 잡념망번뇌 속에 파묻혀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저가 말하길 네가 크지도 못했으면서 이미 큰 행세를 하고자 하는고냐 아직도 너는 멀었다 우리가 도와준 前功은 고사하고라도 벼는 익을수록 숙인다더라 할런지모르지만 이것은 네 마음이 내 마음이라고 도와주기 싫어 벅차는 네 마음을 내 마음을 갖고 읽어 내 마음에 표현하는 것이라 티격태격 피차 일반이라 나만 어떻다고 나무랄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할 것이다。혹 以後에라도 마음이 변해 벅차는 마음을 누루고 사정할지 모르지만 이것이 또한 껍데기를 한가지로 쓰는 너나의 입장변화라 누구의 허물이 상한다하여 이해득실을 논할게 아니라 그 서로간 의지처가 건실한가를 따져봐야한다 할 것이다。 나는 너 아니라도 집할 곳이 많다 한다면 피차 일반이라 오히려 내 쪽에서 얼씨구나 할 것이니 왜냐? 피차 일반이기 때문에 저ㅡ열차를 타려고 기다리는 승객이 너무많아 그 줄을 선 꼬리를 알 수 없다 하리로다。
저ㅡ시퍼런 칼날을 빼들고도 필부의 신실한 마음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그런데 그 마음을 얻고자(삼고초려해도 시원찮을 판인데) 함부로 문을 열라 하는가?…
空亡은 시간은 있으되 시간(回流)의 實相(變化物事)이 搭載된 空化相이 活動할 領域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저ㅡ꼬리부분 왜 그런가 章에 나와야 할 論인데 여기 적혀 있음으로 그대로 정리한다)領域은 十인데 시간은 十二라 오묘한 논리로다。저 앞 어디엔가도 조금 내비친 적이 있지만 달리 생각나는 점이
있어 몇 자 다시 적는다. 즉 五對六이란 뜻이다. 空의 설명을 하기에 앞서 먼저 面積과 부피의 定義(正意)개념부터 몇 자 더 적기로 한다. 그래야지만 말이 풀리게 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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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증 일보 직전장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