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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도관찰

투가리 부젓갈 2023. 9. 4. 00:01

 

◎ 思言行의 여러 형태의 尺度觀

어떤 空이라는 思言行이 있다。甲氏는 그 思言行을 指稱할적엔「가」라하고 乙氏는 그 思言行을 뒤집어서「나」라하고 丙氏는 그 思言行을 뒤집어서「다」라 한다。그렇기때문에 그 思想과 理念이 옷을 여러 形으로 바꾸어 입어 多群象이라함인 것이다.

佛氏以前에 佛思想을 다른 표현으로 指稱했었을 수도 있을 것이니 何必 佛이라고 名 指稱해서만이 佛이 아닌것이며 儒思想以前 儒象이 또한 그럴것이며 仙思想以前에 仙象이 또한 그럴것이니 그렇기때문에 저 앞서말했듯이 그 이름(名)을 붙쳐 저 절벽이라했듯 흐르는 시내라 각종 꽃이라 곤충류라 如他指稱 萬物象이라 하는 것이니 하필 생각의 논리적인 것만을 뜻하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그래서 저쪽 群落에선 그것이 牛氏라 했는데 이쪽 군락 昨今엔 그것이 變하여 馬氏形을 가르키고 있음을 말함인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이고 그것의 變遷科程이나 進化過程을 살펴논 것이 작금의 思想的 多群落일 수도 있는 것이다。(여기서 意度하는 바 內用은 訛傳을 가르킴을 말함이 아니라 여러 分派的多樣한 모습을 取하는 것을 가르킴인 것이다) 이처럼 관점은 같더라도 쓰는 用語나 語彙를 뒤집을 수도 있고 또 관점에 영향을 주는(色感=六感 无感등 여러 動情포함。與件 處地 立長 等) 尺度의 變化로 因하여 관점마져 틀리게 돌아 쓰는 用語나 內在하고 있는 그 意味도 (가)를) 달리 하는 것도 있는 것이다. 하필 무엇이 꼭 그렇게만 생겼다고 고집한다는 것은 一見解에 執着相을 보이는 것이라 할 것이다. 정신적 安定을 오래도록 維持할 수 있는

 

世態 흐름이라면 많은이가 사색할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을 갖게 되어 諸者의 아름다운 各論想의 理念이피어나게 된다。이반면 격동기나 질곡에 헤매일때는 그것을 읊는 정신을 파훼하는 恨서린 사상논조나 분연히 떨쳐 일어서게 하려는 목적을 가진 思想이나 뜻을 잃고 포기하고 사라져가고 도태되고 물러나고 등.제풀에 시드는 것을 애닳어 읊조리는 사상논조가 생겨나게 된다할 것이다。이렇게해서 各種文化의 覺花가피어나게되고 그런 文化 꽃이 萬象이라서 萬家爭名의 森羅相이 있게되는 것이다。

○ 정신을 쥐어짜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바닥이나 바짝말라 부셔져가는 모습 이제는 더 나올것이 없어 헛필만 움직여 紙面만 낭비하고 있을 뿐이다。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엉터리로 집을 꾸며 놓고 들어앉아 자기 위안을 삼는 한심한 작태의 一末을 보는 것 같아 내가 내 자신을 생각해도 안타까운 심정이 들뿐이다.

그래도 없는 생각 생겨나오라고 계속 긁적거려 보는데…

生命으로 볼땐 모든 것이 生命으로 보인다는 것이다.그러므로 以生命 아닌게 없으니 무엇을 지칭하던 모두가 生命이 있는 것이다。어떠한 사상 이념이나 主義論理라도 그 생명이 있고 어떠한 氣質原素라도生命이 있는 것이니 何必 사람의 관점으로 그런것만 생명있는 것이라 하는 것外의 모든 것이 다가 以生命이 있는 것이니 독깨스 신선한 공기 등 생명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저 절벽도 생명이 있고 저 풀 저 죽었다하는 나무등걸토막(유용할 수 있는 가치효용의 생명뿐만 아니라 알 수 없는 웅크린 생명이 한둘아닌 數多일수도 있을 것이다)이며 질그릇 깨어진 오지그릇 사기그릇 깨어진 사금파리조차도 그 생긴대로 그 성질대로 생명이 있는 것이니 생명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사람의 눈이 그 생명아닌 걸로 보고 생명없는 것으로 봐서 그렇지 그 생명이 뒤바뀌어 나타난 모습이 그렇게 卞해 보일수도 있는 문제이니 실제에 있어선 여기서 저기까지의 공간과 그 공간의 기질의 참과 어제와 지금까지의 시간거리속이 모두다 人形이 둔갑하고 이상한 形態로 얼비친 모습이 그 시간이고 그 공간과 공간의 氣質임일수도 있는 것이다。흡사 괴상하게 생긴 사람이 그림자를 드리우면 한 그림자상을 저서 이만큼 그 모습을 내려깔듯 그 奇異하게 생긴 사람에 모습이 그 시간이며 그 공간이며 그 원소나 기질일수도 있는 것이다。꿈속의 제반합성되는 현상이 뒤죽박죽으로 섞임과 같다 할것이다。이러한 怪異현상은 하필 人形의 형태만 취함만 아니라 괴상한 짐승의 형태나 如他 物事의 이상하게 변모된 형태나 일렁이는 변모의 진행중으로도 象形을 짓는다 할것이다.관념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그것이 그렇게보인는 것이다。즉 諸相이 生命의 變貌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理想의 世界) 志向할 바를 세워 나아가면 추종해 따라오는 것이 理想의 果이다。이러한 이상의 果를 이루어 걸리적거리는 허울을 터트려 없앴으니(파괴 無家) 어찌 횡횡 宇宙하지 않을건가? 여러 형태의 가상 問題에 여러 형태로 가상변재를 해놓으면 그와 비슷한 실제상황이나 궁핍한 실상이 똑같은게 당도한다 하더라도 묵은 양식을 꺼내 먹는거와 같으리라。이것은 억측과 망상만이 아니라 거시적 안목을 갖고 대비하는 쪽으로 보는 것이 바른 관점이라 할 것이다。이것을 魔를 항복받아는 것이라 하던가? 많은 의문과 해답을 하는 弟子를 둔거와 같다 할것이며 궁국엔 知見의 국한 경계에 이르러 空化觀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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施設에서 제품이 生產되어 나오는 모습 그것은 그 시간의 모습이다。즉 그 物事에 入力되어 있는 시간의 모습은 그 주위 은저리의 기운과 더불어 맴돌아 그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그 작품이나 그리는 것이 찍히는 것이 어떻게 얼마나 인것이다。物事 등 諸相은 그 시간때의(주위에 한정되건 안되건 공간의 何處를 不問하고) 집 역할을 한다.그래서 恒常이 없고 어떤 내라하는 길게 또는 계속 불변하듯 내세울만한 存在가 形成될 수 없다고 醉醒者는 芽角(항마각과 마각은 힘세기의 차이이다)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견해도 시간이 저만큼 흐르면(옮겨간다는 뜻 시간 축을 따라 지나간다는 뜻. 즉、시간이 지나면) 한때 생각 흐름의 집역할을 한 것이었음으로(견해를 담는 두뇌役事를 말함) 변한다는 것이니 추억을 회상하는 것처럼 된다는 것이다.

그 어떤 내라하고 내세우는 것은 삿된 관점 아직 미달에 관점이라는 뜻이다。여기서 내라(현상되는 것은 停止化로 봄) 하는 것은 常과 마찬가지로 流動時에서 離완된 永遠性을 갖는 개념으로 관찰한 邪僻原素物事의 정지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이 취성자 가르침의 곡해일수도 있다。假象발췌 着想은 석경에 의하다.

◎ 所以恒常 깨어있긴 어렵지만 마음에 변재를 잘해놓으면 (어떠한 不意에 문제에도 막힘없이 답변할 수 있는 궁리를 해서 창고에 곡식쌓듯 재어놓은것。人間이 萬能才가 아닌 이상 상황을 격지않거나 육감치 못한 것까지도 안다할 수 없는 노릇이니 모르는 것은 솔직히「모른다」하는것이 진솔한 변재라 하는 것이다.) 걸림이 없어 그것을 풀려고 윤겁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는 것이 참다운 辨裁) 바른 마음가짐이라는 것이다.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면 ((바르다는 格을 세움은 어떠한 준칙이

없으니 힘이 센것을 쫓아 바르다 하는 것이니 곧 항마가 바른 것이니 이렇게 비뚤다 하면 비뚤어질 수도 있는 비뚤어진 잣대를 들여밀수 있다는 것이다(시간이나 공간이나 그 효용이나 어떤 이유에 의해서던간 가치관은 전도(顚倒)될 수 있는 것이니 임시보는 견지에서 힘의 강약이 어떻다하여 正邪가 흠결(하자)이 잡히는건 아니다。이말은 무슨 말인가? 힘이 센것이 옳을수도 있고 그릇될 수도 있다는 것이니 그것이 나중에 그릇된 관점이 된다해서 지금에 힘센걸 바르다 하는것을 부정할 순 없는 것이란 뜻이다) 降魔란 좁은 소견이지만 心象에 일어나는 다양한 견해나 시공界相 諸如他 事物的 見解나 論理的인 現相이나 관념을 구석(코너)으로 몰아재켜 잡아족쳐 꼼작못하게 하는 것을 뜻함일수도 있으니 하필 순응하게 굴복시켜 다스려 주술로써 최면을 걸듯 一色化(自導대로 추종케하고 감복 환희케하는것) 시킴만을 뜻함만이 아닌 것이다라는 見解。이러한 견해를 갖는것이 또한 일그러진 심상의 모습을 표현하는 견해라는 뜻이다。所謂諸相이 常이 없으니 正格 또한 있을 수 없고 그 正格있다면 그 固執은 허물어지게 되는 집이 된다는 것이니 得達醒醉한 오랜 修行者의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속았다는 것)의 보복적 次元의 저주가 서린 귀신의 둔갑 思想理念이되어 폴포트의 업적과 같은 현상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오랜 修行者가 있다면 그를 둘러싸고 각양의 견해이 일것이니 가르침 받겠다는 모양의 견해 시험해 보겠다는 견해、是非性견해 등。이루 측량할 수 없는 여러 잣대를 갖고 그 修行의 척도를 가늠해 보려 들것이다。그리곤 그 修行者의 잣대라는 것이며 그의 시험이라고 뒤집어 씌울 수도 있는 것이며、또 실제에 있어서도 그 수행자의 가늠하는 잣대일 수도 있는 것이다。(여기서 修行者란 人겁을 쓴 것만을 가르킴만이 아니다。諸相이나 非相도 될 수 있으니 귀신같은 흐름이나 그러한 大勢나 作用興起하는 현상이나 不感치 못하는 것이라도 그 역할(修行해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은 것)을 하는 것까지도 포함됨을 말한다。) 諸相은 힘(力)의 논리에 의해서

 

들쭉날쭉 各樣象을 띄니 힘이 세면 眞好 長當。君臨宇宙라는 것이다.그래서 몇만년 묵은 귀신이 自能力이라 하는 것으로 諸力을 제압해서 世造라 하는 것이라 하고 말하였음인 것이다.

이것이 所以 只今 마음에서 일어나는 痴卒한 현상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로 말할 수 있으니 狂者 加附言한다면 힘이면 如何한 醉醒者類는 勿論 宇宙도 때려 눕일수 있다는 뜻이다.))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이상의 말씀은 이쪽의 치졸한 생각의 一片을 내보인 것에 불과한 것이지 시험코자하는 저쪽이라하는 운명 시공간이 있다면 그 귀신이 어찌가만히 있겠는가? 별아별 어지러운 亂魔事를 갖고 시련을 줘 어디 긴가민가를 볼것인데 괜스리(쓸데없이 독백하듯 미친 행위를 짓고자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 제어한다는 표현으로 여러가지를 갖고 시런 고초를 주게 되있다) 理由없이 노리개 될 필요가 무어있겠는가? 이런 말씀이다。정직하다 마음가짐하는 것은 저(自) 마음의 변재(다독거리는 다스림 그렇게 해놓는 것)이지 어떤 껍데기를 쓴 귀신이 인정해줘 (속마음을 훤히 들여보듯) 亂魔의 시간에 들지않게 보호해 주겠는가? (윤겁의 걸림에 들지 않게 해주겠는가 이런 뜻)

헐뜯고 해코지할 먹이체나 다스려야할 덩어리((마치 병역미필자의 바른말하는 것을 병역미필했다는 것을 덫으로 모든 옳은 理治 내놓음을 때려잡는 것 같음 그렇게해서 주눅이 들게하거나 필자가 지식이 크게없어 용어의 저속한 표현을 어찌할수 없다) 자극을 줘 일약 용약 고취시키게 하는 악독한 마음을 갖게한다거나(두고보자는 식의 사악한 마음가짐을 일게하는 것)하는 그런것으로 비춰지는 것을 말함 약점을 잡아 전체를 호도한다=(전체를 싸잡아서 매도하는 것)。그렇게해서 사악한 마음이 일게 하는것))로 보인다면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즉 중구난방의 정리해야할 대상으로 보인다면 아무리 저자신을 그지없는데까지 도달했다하더라도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것이다(가만히 있어 당하는 것을 忍辱보시의 성취론 볼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정리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 심상이나 속에 들은것은 겉과는 다르니(그것。그렇게 볼것이 아닌데 어쩌구… 등등) 알아달라는 표현으로 (自我위상 정리) 속象이 이렇다함을 諸行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저 美材로 보이는 것은 풀은 풀 돌은 돌(속象의 表 露出)이 아니라 양에 탈을 쓴 이리나 양이나、저 오물 덩어리로 보이는 혐오체는 ((제마음에 혐오의 생각이 일어 혐오스럽고 구역질나고 무섭지 범(호랑이)의 상을 계속 들여다보고 웃는 상이라°마음속에 그려봐라 그것이 웃는 것처럼 보이면서 빨려들듯 할 것이다.또 뒷간의 구덕이는 싫다는 느낌을 가져서 싫은 것이지 사람이 먹는 번데기나 키우는 누에에겐 왜ㅡ그러한 감정이 들지 않는가? 이런 말씀이다. 아무리 처지가 다르다 하더라도 그 마음 먹기에 따라서 흔디 부스럼도 아름다운 꽃이 피어난 것이라 한다면 그렇게도 보일수도 있는 문제인 것이다。)) 늑대의 탈을 쓴 천사나 선녀´ 겉과 같은 늑대도 될수 있다는 것이다。내 심상은 걸림이 없으나 自我相이 남에게 어떻게 비춰졌는가? 이것이 문제라는 것이다。他라하는 생각이 自我라 하는 象을 걸고 넘어지면 걸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나 입장의 조명이나 번복(뒤바뀜) 현상이나、버리는듯한 내가 아니라는 他라는 생각을 염두에 두지말라는 것이다。제상이 비상이라 허울너울 현상이니 갖은 상이라。심상을 일으키지 않으면 바다를 기울겨 쏟아낸거 같이 器虛에 도달하게 된다는것이다 기허 또한 實體가 아닌것이나 아무것도 아니라곤 할순 없는 것이다。즉 벗어난 경지 걸림없는 무위유동인 것이다.

○ 그 醒者의 弟子 그 땅에서 成就했다는 어느 修行者의 스승(師)이라 하는 者에게 속았다는 표현、인 제(只) 다시 고찰해보니 또는 실제 격어보니 (어떤 樣象現相을 띄던간)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의 표현 恨

 

서린 푸념 섞인 흐름속의 잠재의식이 속은 것에 대한 보복적 차원에서 저주스런 象(그쪽에선 잘해보겠다는 行爲象이나 멀출 수 없는 미끄럼 위에서 함정으로 빨려들듯 그런 흐름을 이루거나 그에 타게 되어 소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다른 자가 혹 보고 걸림막대라도 걸쳐주면 그에서 벗어날 수 있을진 몰라도 그러나 이것조차도 그에 있는 자에겐 걸리적거리는 것으로 여길 수 있고 그 미끄럼 타고 함정에 드는 것을 달콤한 맛 짜릿한 맛으로 느낄 수도 있고 그러한 附隨적인 맛을 느끼기 위해 계속 미끄럼을 타고자 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흡사 마약을 주입하는 것처럼 말이다)으로 뒤바뀌어 표출된 것이 以前에도 因用했지만 바로 폴포트 思想理念(이 또한 감명받고 영향받은 원인 제공의 相(象)이 있음인 것이다)에 의한 그 實行業積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이래도 그 내세우는 주장이 옳은 것이냐? 이런 뜻이다。너가 醒者이면 어떻게 좀해봐라! 아님 너는 거짓을 늘어노은 자일뿐이다。하는듯 말이다。時空森羅物事가 忍辱을 겪게 되는 原因은(인욕을 겪는 것으로 보거나 보일뿐 다른 각도상으론 그 아닌 여러 가늠 잣대상도 될 수 있으니 그 一片을 든다면 脫破象을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니 즉 그러한 깨트림 파괴도 있다는 뜻이다. 하필 인욕시의 관점만이 아니란 뜻이다) 저쪽 이쪽을 나누는 兩象論을 들어서 남이 나의 생각(心相)을 읽지 못하는 待接이 그런 상황이나 관점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저쪽이란 것이 이쪽이란 것의 정직한 心相 上達한 位致를 알 수 있겠는가? 이쪽이란 것을 알아준다면(對象體의 實象을 안다면) 어찌 인욕을 줄것인가? (주는 것으로 될 것인가? 상대방이 송구스런 덕되는 마음 고마운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 될래기지) 터트린맛 깨트린 맛을 보이는 것으로 보일내기던가 그 實象속에 들은 것을 들어 내게 하던가未達이라 미처 몰라 뵈옵고 이런 과오나 실수를 저질렀으니 어쩌구 저쩌구 할래기가 아니던가? 그래서 그 위상을 높이려고 둘러리가 필요한 것이니 비서가 있고 앞장 선 소개인이 있게 되는 것이다。같은

 

부류인줄 알고 싸잡아서 불타는 구덩이에 던져 버렸다 하면 해볼 도리 없는 것이다。(이런 급박하고 어지러운 事態에서 서로가 아비규환처럼 나대지 제가 무슨 보살이라고 자비심을 내어 如他를 구제하겠다고 (如他의 亂數多한

고를 滅度(소멸시켜 없앰)하겠다고 거짓象을 지어 휩쓸려 들어가고자 하겠는가?) 그러니까 던지기 그 이전에 같은 부류 아니라는걸 짬을 만들어서 어떻게든 증명해 보여야할 것이니 마치 패스보드(信物) 같은 것을 들여 밀듯이 말이다。그렇게 되면 쌓여 들어가다가도 건져나올 것 아닌가? 아궁이에 불지피는 자가 무슨 억한 심사로 지폐 만원권이 휩싸인게 눈에 띄었는데 그냥 아궁이에 거둬넣을 것인가? 얼른 집어 내어 利用하고자 할래기지 지금 세상이 자기 알아 달라는(피알=자기 선전) 세상이라 하니(또한 실제로 그런 修業功積을 갖춰 갖고 있어야지만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알아 달라고 뛰어보고 볼것이다。거듭되는 곳에 절로 올라선듯 내보란듯 우뚝하게 깨어 있을 것이니 忍辱은 가당찮은 퇴색된 논리라는 것이다。먹이체가 또한 알아달라는 깨트린 맛을 보이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辱이 아니라는 것이다。보시처럼 보이지만 알아 달라는 것이니 관념의 刻畵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할것이다.

◎ 破覺이라 하는게 한낱 정신만 자극시켜 파고드는 것이라 하나도(一點覺도) 취할게 없다 할것이니 徒是 사람을 돼지 멱따듯 악을 쓰게 하는 거와 같다。어떠한 견해이던 家라는 것이니(허울) (次元의 如何有无 다양단계를 떠나) 空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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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無란 뜻인가? 그 字形을 볼진데 필자가 의도하는 방향대로 설명한다면 집(無)을 태우고 있는 모습

 

이다。 (이 또한 들은 풍월 聞風月이다) 집이란 뭣인가? 집이란 어떤 방식(읽기 설기)을 채택하던 만들어서 그 主된 것이 居處를 삼는 것을 뜻한다。즉 어떤 방식을 통해서 만들어 된 것이 거처를 삼는 곳을 집이라던간 지어진 거처를 자세 살펴 보는 것을 一家見解(또는 一家 관찰)라 하는 것이다。이러한 집이라 보는 것(家見 見解)을 땔나무 부엌아궁이에 짚히듯 그 어떤 방식을 채택하던간 (一例로 질서정연한 火로써) 그 집을 태워 버린다。소각시킨다는 것이 곧 無字形의 本의미(없앰)인 것이다。((母无가 通意字이니 母胎는 原來 없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으로써 그 字形意를 取한 것이고 无形은 一울(回家)을 內面에서 내다보거나 外樣에 들여다 보거나 여러 形을 취택한 것이라 확실한게 없다는 뜻(※ 필자의 식견이 모자름을 보이는 것이니 뜻글자는 무엇을 의미하던간 표현하는 原因이 있을 터인데 이것은 그 分野의 學者들이 잘 알것이다。一例로 한 사람이 한손으로 하늘(허공중)을 받치고 쳐다보는 것 같다)에서 취택한 것이라 할 것이다。혹은 俗者나 半字일수도 있다。허공중은 낮은 단계의 차원으로 본다면 以 없는 것의 대표 性을 띄는 것이다。)心火속엔 어떤 念願이나 論理的인 生覺도 들어 있을 수 있으니 즉 합리적인 생각 변재로써 걸림집(蓋起된 問題 題起된 疑問 허울苦)을 태워 없앰을 말함인 것이다.이렇게 말하는 것이 또한 家見인데 즉 끊임없는 가견에 의해 가견이 生息한다는 것이다。그 가견을 불사름에 빛을 발하면 명암 有无를 논하게 되는 것이며 기타 등등 다양성을 논하게 되는 數多가 되는 것이다。이를테면 저 태양은 이글거리는 가견 덩어리이며 시공 우주간은 가견을 태우는 화독이며 타는 빛이 얼빛치는 받쳐주는 반사체의 물질도 그에 있으며 그런 것을 感하는 感體도 그에 있으며 그 빛이 능력 다함에도 달할 때까지 무한으로 뻗게 하는 닫침없는 虛器이기도 한 것이다。이처럼 無란? 그 가치를 살리면서 사라져야 할 林木(땔감의 以家見)을 갖고 저 家見도 따라 태워 없애 버린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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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丑年 陰曆 섣달 열나흘날 또 移舍를 가게 되었다。초안작성해놨던 묶음紙를 어느 틈엔가 박혀있던것을 찾아내게 되었다。그래서 정리 대상에서 누락되었던 것을 다시 정리해보기로 하는데 다음과 같다.諸般게「삿됨이 없다」는 주제이다。邪(삿)됨은 없다。즉 사탄은 없다。제(自) 심성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는 主題에 누굴 몰아 사탄이라 할 것인가? 설령 사탄이란걸 假說的으로 세우고 그것이 偶像에 의한 念願을 불어넣은 體가 되어 어떠한 능력이란게 생겨서 다ㅡ 빼앗아 간다 하더라도 사탄은 없다。그러한 헛상이 비대한 몸집을 해갖고 나를 짓누르듯해도 또 어떠한걸 듣고 심상을 뒤틀리게해 성냄을 돋구어도 화를 부추겨도 그것은 사탄이 그러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修養의 정도가 어느 정도 熟成되었는가를 그물른 길을 다지듯 든든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또 화풀이할 곳도 없는 그런 곳으로 몰아 넣어도 亡하여도 몰락파산 파탄 화목이란게 깨어져도 사탄은 없다. 왜냐? 人두겁을 썼으니 사람이 하는짓을 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한 어떤 가짐이나 행위를 짓는 것이 사람의 諸行을 사탄 行이라 할 것인가? 사탄이 있어서 그러는건 아니다. 즉 사탄은 없다하면 없는 것으로 관념이 흐르면 없는 것이다。徒是 모든게 제가 잘 살피지 못해 일어나는 것이요 그 資質과 力量에 相應하는 運命의 잣대의 소관일 뿐이니 마치 해지면 밤이오듯 운명의 進行일 뿐인 것이다. 모든걸 자기의 位置에서만 가능하고 자기 위주로 格을 定立하면 그게 독단적 독선이지 상대방이나 여럿의 입장은 고려치 않는 처사로써 (참도 없지만 참이 있다 가정한다면) 참으로 옳다하는 善이라 할순 없는 것이다。(善은 힘센 것이 선이라는 논리가 또 삼상에서 튀어나오고자 한다) 어떻게든 해주고자 하는 이(흐름 시간 善意의 協助者)는 如來(心象의 完象=空=〇)를 보고자 하는 이를 위하여 格(걸맞는 짝과 같다 할것인가?)을 맞춰주길 힘쓰나은 그것이 여러 森羅에게 다맞는 格을 갖다 붙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고 맞는 것은 공교롭고 우연에 一致처럼 보여지는 것일 뿐인

 

것이다.그러나 그것은 모순 같지만 그렇게 흐르는 운명의 시간에 의해 필연적일 수도 있다.누가 나더러 운명론자인가? 할런지 모르지만 또 운명이란 것도 개척해 나아가는 것이라 할런지 모르지만 그것은 운명속의 여러 길 어느 한길을 선택하는 것이지 전체적인 짜인 틀의 흐름을 막아재키거나 바꿀 수는 없는것이다。이런 유추가 여기에 잘 맞을런지는 모르지만 一例로 여기 유명한 점장이가 있다。그 보는 방식과 술법이 독특해서 아주 잘 맞춰 쪽집게라 한다。즉 그 쪽집게는 그 점장이가 자기에게 맞는 옷과 치장을 한것처럼 그 쪽집게도 그 점장이의 쪽집게란 뜻이니 공교롭게도 우연에 一致처럼 보이는 운명을 관장하는女神같은게 있다면 그는 그 쪽집게에 잘 들어 맞는 물건같은 사람들만 그 점장이에게 보내준다는 뜻이니(사람만 아니라 時局의 판단이라든가 어떠한 양상을 띈 것이라도) 그 쪽집게에 맞지 않는 물건같은 사람들은 보내주지 않는다는 뜻이다。(一例로 희롱이나 시험해볼려고 가사내(가시내)가 남자 행세하며 언제쯤 장가 운운한다거나 여인 행색 꾸민 사내가 成親하였으면서도 언제쯤 시집가겠는가? 운운한다던가? 등등) 이런 식 왜냐하면 맞지 않는 것을 보내주면 그는 유명한 점장이가 될 수 없어 너는 어떠한 空으로 있으라는 운명질서가 어그러지기 때문이다。어그러진다는 것은 無에서도 存在치 않으니 만약상 존재한다면 저 푸른 창공도 반쪽이 갈라져 색깔이 틀리던가해서 어긋나 보여야 할것 아닌가? 창공 창해가 一色이라하나 그렇담 맞닥드려진 곳에 금이 없어 보여야 할것 아닌가? 저마다 제 위치를 지키는 空家이라서 어그러짐이 없음인 것이다。뒷말이 또한 어긋남을 두둔하는 말같지만 엄연히 하늘과 바다는 意旨와 名分이 다른 것이다。또 누가 있듯 심상의 한편에서 말하길 그렇치 않다하니 그대의 논리가 도리혀 편파적이요 비판적이요 옳은 理治를 說하는 이들을 시샘해서 헐뜯고자 하는 구실을 찾고자 하고 自己의 (총명치 못해 제대로 분간치 못하는) 그릇된 觀을 逆說的이나 궤변으로 늘어 놓고자 하는 것이지 일더하기 이는 삼이라

 

는 것은 一萬 森世의 通用이다 한다면 그렇게 질책해도 당연하다 할것이나 森世의 通用이다 하는 생각 관념이 여기 둥그런 동그라미 속에 여럿과 같이 들었다 할 것이다。즉 그 동그라미는 쪽집게인 것이다。收容하는 그릇(器)은 內面에 일어나는 現相을 일일이 표시하듯(체크) 알고 있게 된다는 뜻이다. 사탄은 단계를 차차로 높여가며 굴레를 깨뜨려 벗게 하는 引率者이며 궁극엔 器虛에 이르게 하는 스승인 것이다.그 弟子에 끼치는 가르침이 혹독하다하여 스승을 사탄으로 매도하는 건 옳지 않으나 그 스승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스승이라 하지 않는 바에야 짐지우는 스승이라 할 理由가 없는 것이다. 저 나를 못살게구는 시운 공은 사탄이 아니요 나라는 존재를 어서 버리라는 그에서 어서 벗어나라는 편달하는 스승인 것이다。이것이 편파적인 말같으나 편파적인 것이 아니요 꾀이는 말이 아닌 것이다。이것을 꺼꾸로 본것인가 하면 그렇치도 않다(즉 꺼꾸로란 德되는 것 달콤하게 하는 것을 가르키는 것인데 그런 것은 나를 빠지게 하는 함정 중독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그래서 궁극엔 병폐에 이른다는 것이니그렇게 됨。덕됨이 아니라 爲害를 끼치는 眞魔 眞 사탄이 된다는 것이다) 所以 못살게 구는 것같은 혹독함을 美化하는 말이 아니란 뜻이다.스승이 스승이라 하지 않는 理由는 잘은 몰라도 얽매이고 싶지 않기때문이다。왜냐? 얽매이면 포로가 되어 그 걸림고에서 빠져나가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소가 수례를 끌고오다 목적지까지 온다음 그 수례를 벗어치운다면 얼마나 홀가분하랴? 소는 스승이라하지 않고 스스로도 그 굴레 벗은 것을 즐거이 여길 것이다. 즉 저 이 空化 器虛가 되어 內面의 다양한 양상을 들여다 보는 자리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마치 추억을 회상하듯 어항속의 노니는 고기를 들여다 보듯 말이다. 스로가 고기였던 것을 보는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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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念流가 妄想을 짓기 때문에 끊어 치우라는 것이다。流觀念이 껍질을 지어서(見解나 樣象) 뒤집어쓰고 선 휘둘러치는 것(橫橫宇宙)이 宇宙樣象이다. 다시 말해서 관념이 妄想으로 그려지은 옷이 삼라만상이라는 것이다.그러니 念流를 요격을 加해 끊어 버리면 諸굴레를 벗어난다는 것이다。고것참 그럴듯한內用이나 요런 잔꾀로 속이는 말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 以 아무러크소니의 가르침이다。一切의 見解가 진리란 탈을 뒤집어 쓴 착고 올가미이니 누구의 말이라도 신용치 말라는 것이다。(파괴해 치워야 임의로운 位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妄想은 活動을 制約하는 가두는 獄이요 障害요인이 된다는 것이다。그 脫破象이 아니요 妄想탈이요 망상탈을 줄줄이 엮어 전시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진실도 없지만 진실한脫”(破)象도 없으니 一切의 相 見解를 폭력을 가해서라도 때려 부셔버리라는 것이다。一切의 先知를 인정치 마라 그렇다하는 둘러치고 앉아 있는(刻이 깊이 파여 碑文 字처럼 박혀있는) 以 방해자니라 이렇게 邪覺은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저 고(罟)에 메인 무리들이 셈없는 날을 쉬지 않고 시키는대로 하면 벗어날것처럼 하고 있는 것이다。一切의 法方이란 律을 옥(獄)으로 삼았으니 옥을 때려부셔버리고 훌훌 털고일어나라。그래서 아니꼬운 의식주란 옭가미로 너를 고삐하여 채거던 그 고삐를 싹둑 자르고 나오너라.생계가 막막할까? 엄동설한에 얼어 죽을까? 컴컴한 밤굴이 잡아 먹을까?를 두려워 하지 말라。賦與된命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지… 그 더럽고 치사하게 느껴지는 흙구덩이 같은 곳에 있는 것보단 낳으리라 삿된끝이 하늘가에 다달은 취성자 상을 해갖곤 이러한 망상이 잡히게 하여 너를 꼬득이고 있는 것이니 그대는 절대로 이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正邪는 思考와 論理性의 우월과 열등、판단 준칙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있는 것이니 요량대로 하라는 것이다.一切의 견해를 내지마라 그 견해라는 것이 처음에 생각을 낼젠 아닌 것같지만 念이 진행중에는 마음대로 상상하듯해서 이리 흘렀다 저리 흘렀다 틈새만 있

 

 

다면 흘러들어가 메꾸고자 할것임) 誤認하고 神家도 따라 발작하는 망상으로 엮어진 묶는 끈이 되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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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얘기는 (앞 내용 先知와도 모순이지만) 極과 極을 말하는 것인가? 兩立할 수 없는 것이 서로 양립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徒是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증만 자아내게 한다。그렇더라도 정리해보기로 하는데 기름과 물은 섞이지 않고 물과 불은 막이 없음 양입할 수 없고 유언비어는 멀리 가면 와전되고 길이 아득하면 좁아 보여 관념이 틀리고(나열성 진행은 멀면 좁아 보이고 가까운데는 넓어 보인다) 콩 열과 열 하나는 엇비슷하고 또 열하나와 열둘은 엇비슷하다。그것이 나아가선 무량셈 엇비슷한데까지 이르러 폭이 넓던가 斜視각도가 되어 궁글러 돌게 되던가 할것이다。즉 變하고 틀려서 相異 相反이나 서로 들고 치는 것이 된다거나(즉 어떠한 한가질 갖고서라도 내비치거나 觀하는 位置에 따라 多樣한 覺象을 지음에 立長差異가 생기므로 분열 파당적 논쟁같은 것을 現相(興起) 시켜서 양립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융화나 분열 등 같은 양상을 띄게 되어 連緣하여 諸家가 存在하게 된다는 것이다。이는 왜 그런가? 한가질 갖고도 표현 표시하는 方式과 用語나 행동하는 모양을 짓는 것이 그 느끼는 대상체 따라 이쪽에서도 입장을 달리 하지만 저쪽 촉감하는 이의 의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여러가지임에야 말할 나위랴? 界와 空은 數量이나 그 어떠한 것이라도 뜻이나 이름을 代身할 수 없어 界와 空이라 하는 것처럼 갖은 삼라가 갖은 삼라라 하는거와 같음이로다。다만 자기의 얻은 바를 내보이고 본받게 하고자 하여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이에게 도우는(베풀음을 펼려하는) 大救援者역할을 한다할 것이다。未知의(또는 알아볼 수 있는) 능력 가진 先知識이 구도자의 次元을 자로잰듯 요량해서 알고 있으니 조그마한 쥐구멍에 큰 고양이는 들여 밀고자 않을 것이요(걸림 고(罟)를 때려 잡을려면 그에

 

맞는 적당한 계책을 쓰게 한다) 자라는데로 경계나 굴레를 지키는 司命을 고양이에게 맡기듯 할것이다. (깨침이 어느 차원에 이르렀는가를 봐가면서 諸疑題를 제시하여 수행에 정진케 하는 것이다.그 次元을 알아 볼 수 있는 해답 또한 의제 제시에 있는 것이니 콩 열말을 기준해서 아래위로 가감하는 거와 같다할 것이다) 빈못에 물이 고이면 水位가 오르게 되어 있는데 복안에 맞지 않는다 하여 왜 차오르느냐는 식의 생때 쓰듯 逆하여 못오르게 할순 없을 것이니 (즉。反應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守界는 차오름에 따라 점점 물러갈 것이다。곧。원인이 있음 결과가 어떤 모양으로던 나타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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醉醒 ᆢㅡㅡ 以意味를 高麗靑磁를 갖고 말하여 본다면 취성이란 世行 나그네가 이룩한 果(修行者의 功果)일 수도 있다。고려청자는 도공이 만들었다。그리곤 그 아름다움을 오랜 세월토록 찬미하며 소중히 여기게 한다。소중히 여기는 것은 공경해서 섬기는 거와 같고 그 공경하여 섬기는 이유는 탈파득도의 位置 즉 어떤 한도막의 한계점에 이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그러나 욕망의 한계는 한정된 劃을 긋지 못한다. 그래서 어느 한토막이라 하였음이다) 그러한 한토막의 성취감을 맛보는 것을 限界性을 가진 취성이 됨이라 할것 같다。그 念願함에 대하여 그것이 當時엔 흡족함이 깃들어진 것으로 되어 보인 것이니 아쉬움과 걸림이 있었겠는가? 도공은 도공 자신의 자신이란 굴레를 파괴해 버린 표현을 고려청자란 物에다 대고 표현 표시하였을 따름인 것이다。그 고려청자는 자신의 心象을 비춰본거울 곧 나(我)이니 내가 취성의 자리에 섬을 어찌 求道修行者의 位置인 내가 소중히 여기며 공경치 아니하겠는가? 이런 뜻이다.

삿됨을 버린 克己는 영원한 진리인 것처럼 보인다。그러나 영원한 진리는 길이 멀어지면 좁아 보이듯하

 

다。사라지듯 시들해질 뿐이다。계속 추구 쥐어짜듯 되새김은 그것 또한 굴레고에 얽메일 따름이지 벗어재킨것은 못된다 할것이다。계속 상기하자함을 자극받았던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나 두고 두고 울거 먹어 나중엔 그 맛이 모다 없어진 찌꺼기를 빠서 먹은 거와 같고 흡사 未知의 山野를 내다르고자하는 망아지의 고삐를 꼭 움켜쥐고 있는 거와 같다할 것이다。세월이 지나면 한시대의 막은 내려 저 영구할것 같은 돌담이 무너지는 것 같은 맛을 볼 것이다。이것이 또한 오랜 풍상을 겪은 고목이 더는 버티지 못하여 그 기다려 돌아온다는 것이) 스스로 무너지는 자괴감을 맛봄이 아니던가? 고려청자는 얼마동안의 욕망을 억누르는 역할(새로운 의욕을 가지기 까지 재충전 기간이라고나 할까)의 몇날의 克己는 될지언정 無約의 克己는 될 수 없다。왜냐하면 스스로 자만에 빠져 以(上) 없는 것이라고 나대기 때문이다。가만히 있음 영원한 진리가 될진 모르나 가만히 있질않고 움직인다。움직인다는 것은 관여하고 관여케 한다는 뜻이니 극한 아름다움은 貪을 일으키지 않을 건가? 사람들의 심성을 움직여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심성들에 의해 자리를 떠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요망하고 간사한 사람의 심리가 지극히 삿되어 종잡을 수 없어 도취되었다간 싫증을 잘내니 저 담비 가죽이 종당엔 개꼬리에 붙듯(또는 관심밖으로 멀어지거나 부주의 또는 공교로운 불의의 측량치 못할 것에 의해) 드디어는 깨어지고 말리라。이제 그 청자의 劫이 지났다고 모든 사람들이 웅얼거릴것 아닌가? 욕망의 불꽃 염원은 끄는 끈은 无現하여도 끝이 없고 한이 없어 새로운 의욕의 겁이 시작된다고… (무인 설正 사흘 丑時) 정리 때 시간임

○ 다음 글은 또한 언제적 착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초안 작성해는 것을 그대로 옮겨보는데… 屢數는 無方이니 어리석은 想念이 그렇게 그렸을 뿐이다。生覺은 宇宙自然生態가 運行流動하는 科程속에 生成된

 

物事의 內在된 習性이 반복 作用中에 本能이란게 形成되어 그 本能이란 것의 點次的인 단계를 밟는 進化에서 왔을 뿐이다.즉 이렇게 해서 生覺이라는 것이 형성된다는 것이다。物事가 內部的으로 어떠한 主管할만한 性質이나 性分(個性)이 얽히는 걸(응고=엉기는 것) 갖다 精神

고이라 할 수 있는데。以精神에

되새겨(刻)지는 번복性 반복(엎치락 뒤치락의 반복) 作用이 本能力이 되고 그 本能力 또한 作用의 頻度가 屢積되면 습관이 되고 如他物事와의 접촉과정 속에서 마찰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 허물이 벗겨지는 것처럼(어떠한 원인 작용이 있음 반응이 있고 결과가 있다는 것임) 터트려지거나 깨어지게 되고 진행中이나 結果로 因한 다음의 나타나는 상태 즉。쓰리고 아픔을 느끼는 통증을 깨닫게 되거나 흥분하는 자극을 받아 환락을 알게 되고(※ 七情과 五欲이 心中에서 일어나듯 諸物事의 發性단계가 그런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는 것임) 이런것들이 애간장을 끊는 듯한 寃과 恨을 낳아 入力되어지니 그 누적은 점진적 발전이나 원위치로 되돌리고 되갚고자 하는 곳 中에서 손익의 슬기를 체득하게 되고 슬기는 料量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니 權衡은 치우치게 되니 탈취 또는 탐욕을 낳게 된다。슬기를 얻는 단계가 邪벽스런것이 스며든 것을 표현하는 異性이라는 것이 형성되는 단계이니 이에 비로소 잔재주(小技能)를 부림이 시작되는 것이다。이렇게 되면 원숭이가 막대를 잡고 휘둘러 대적함과 돌로써 堅果를 쳐서 깨어 먹음과 수달이 돌을 잡고 자기배에 조개류를 얹고 깨어 먹을줄 아는 次元에 이르는 거와 같음이니 他物을 利用할줄 아는 단계를 本性과 異性의 中間단계라 할것이다。역경(고난)을 헤치고 먼저 깨어난이가 (영장류 人間等=모든 生物이 또한 그러하니 다음 말은 생태 환경에 적응하는 諸생物 모습의 變異를 말한 것임) 불필요한 것 환경따라 거추장스럽게 여겨지는 것은 자기에서 제거하고 유리한 것은 둗아나게 북돋우니 꼬리를 짜르는 것이 잇발로 손톱을 물러 뜯어 다듬는 거와 같고 생각을 하는 것이 수염을 보기좋게 기르고 쓰다듬는 거와 같은 것이

 

됨인 것이다。인간이 악귀가 들리듯 사악한 이성이 들리어 갖은 해악을 낳고(※ 명분은 합리성을 띄지만 그 어느 한구석엔 검은 심상을 감춰갖고 있게 되니 밝음이 밝을수록 어두움 또한 더욱 진한 색체를 띈다할 것이다)를 만들어 갖곤 參商의 長短을 論하며 是非를 일으켜 그에서 허우적거리니 곧 有數며 有數는 屢數이니方이 있다하며 어느 方은 무슨 數이며 저것은 몇개이며 이것은 몇년이며 그에 대해선 어떻게 대처해 한다는 등 가당찮은 셈을 하며 시대며 뻐기며 무슨 영장입네 하는 것이다。누수는 누수의 궁극 歸原은 허무 공허方이니(方=法=相) 따라서 헤아려 할 건덕지나 그런 것이 有 无한 것조차 불투명한 것이다.

人身을 갖고 살핀다면 생각이 누적되면 기억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누적되는 것은 知識인데 이것 또한 기억에 의해 되살아나 그 知識을 認知할 수 있는 것이다)이(도)된다。또 생각은 본능력에서 온다했다. 본능력이 또한 생각이다。이러한 (((어떠한 요인((그 요인이란 것은 저촉이나 窮求(구해 찾음。思索)이다))에 의해))) 性覺이 튀어 엮어 새김(刻)을 일으키는 精神의 집(家)은 두개골과 등골이며 그 신경계통은 全身體에 고르게 퍼져 있다 할 것이다。이것을 통털어 精神一家라 할 수 있으니 말하자면 宇宙는 大精神의 집으로써 어느 한곳에서라도 일어나는 현상을 감지함을 놓치지 않는다는 뜻이다。三골수에 해당하는 곳이 大宇宙엔 어딘진 알수 없으나 분명히 있을 것이니 이것이 기본적인 우주형성 논리 면적과 부피 論理(가로세로 높이 三支原 成形體)인 것이다。즉 우주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곳은 우주의 형성논리라는 것이니 어디라는 것은 장소의 뜻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어디라도 그 갈등선이 이는 중심축이 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覺의 實體는 (없다) 어디 一定하게 定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끌어 의도하는대로 쏠려 모이는 곳이니 自일수도 他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양손이 서로 쌀수있듯이 말이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空主長의 假面을 벗겨 보자。무슨 어줍잖은(未熟한=덜떨어진) 속셈이 있는가를? 갖은 현란한 감언속엔 바로 이런 치사하고 탐욕스런 속셈도 있는 것이다。필자가 편협되지 않고자하는 空을 말하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좀 모순된 면이 없지않아 있지만 이 또한 한굴레를 벗겨 空으로 되고자 하는 일편의 과정이라 한다면 큰책은 잡히지 않을 것이다.무슨 말을 할려하는데 서두에 이런 私設이 긴가? 한다면 바로 내 말씀이 그 말씀이다。무슨 거창한 말을 할려는 것은 아니고 다음 말을 주제로 내걸려고 하는 것이다。즉 實力을 培養할렴 發想의 轉換부터 해야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勢를 엎어트릴려면 실력이 있어야만 하고 그러한 실력을 얻는 것은 근본 착상부터 새로운 곳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것이다。남이 이룩해 누리는 것이 좋다고 따라 하는 모방은 언제나 뒤쳐지는 行爲인 것이다。그러고선 旣存의 流行하는 勢를 파훼해 치우거나 逆流시킬순 없는 것이다.모방에 뿌리를 둔 것은 앞서는듯해도 한방향으로 다름박질치는 경쟁이 될 뿐 떨쳐내거나 무너트리는 것은 못되는 것이다。즉 세의 立志 强化나폭의 확대만 가져올 뿐이다。昨今 世態思潮를 考察해 보건데 이것이 무슨 大氣 氣流와 관련있는 것인지는몰라도 西勢의 팽창은 東方을 점거하는 방향으로 나아왔는데 이것을 뒤집어 엎을렴 西勢 그들의 發想을따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즉 서세동점하였는데 이는 物理相의 깨트려지는 형태(발전、발명)가 그렇게된 것을 뜻함과 같다。다시말해 동세서점 서세동점의 논리론 되질 않는다는 뜻이다。발상부터 달리해야 한다는 뜻이다。생각해보라ᆢ서세동점 논리라면 저들이 계속 서세동점할려고 할래기지 어찌 그 流勢가 역전되듯 동세서점할 기회가 주어지겠는가? 이런 말씀이다。바둑을 두대 선수를 빼앗겨서 상대자가 유리한 지점을 선점해서 이쪽에서 쫓아다니면서 막다보면 敗하듯이 저쪽에서 기선을 제압한 이상 그대로 밀어붙여 승세를 굽힐래기지 이쪽에서 기회를 잡긴 여간 高段이 아니곤 힘들다할 것이다.그러니까 한번 한쪽으로 밀리는 세가 되면 반대로 흐르게 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그러므로 그 짐이 넘어가기 以前에 四肢를 떼어내는 出血을 각오하고 개벽해야 한다는 것이다。저들의 世上經營 논리가 화려해 보이지만 어떤 것을 일방적으로 회생을 강요시켜서 어느 一方의 향락을 얻게 하는 그런 치우친 경영은 궁극엔 세상을 大亂케 하는 것에 목적을 둬서 즐거움을 맛보려는 사악한 자들의 농단으로 여겨진다면 그로부터 흩어진 여러 物事理相을 따라 원숭이처럼 흉내낼게 아니라 그런 行態를 뒤짚어 엎을 궁구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物事를 다스리는 발상부터 새로운 것에서 일으켜 상대의 爲害 끼침을 逆으로 갈마들지 않고선 저들의 魔手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즉 상대자의 논리를 따르면 항상 먹힐래기요 그 논리를 배워 저를 되먹고자 하는 발상은 이미 뒤떨어진 발상。이미 잡을려 하는 물체는 저만큼 지나갔는데 이 만큼서 나꿔채고자 하는 행동은 늦어서 되길 않는다는 뜻이다。저사람은 범(호랑이)을 그리되 꼬리부터 먼저 그려서 이것이 영원한 진리요 철칙이라 한다면 이 사람은 그렇게 따라할게 아니라 범의 머리부터 긋는다는게 아니라 아주 그 범이란걸 때려 잡을 총이나 포수를 조각해 저의 영원한 진리라 하는 것을 짓뭉게야지만(악질 악독한듯 하지만) 그세가 역전되고 그 잡고자 하는 올가미를 빠져나옴은 물론 도로 나꿔채는 덫을 이룩하게 된다는 것이다.물론 저쪽이 유도하는 유도작전(내가 이렇게 하면 너는 이렇게 대처할 것이다 하는 작전)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저는 그런 곳속에서도 실리를 취하려들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어떤 현란한 것을 갖고 유혹하더라도 개의치 말고 있다가(야비한 것 같지만、등뒤에서 치듯이) 불의에 습격한다면 저들이 뜻한 바들을 천재지변이 일어나 무너트리듯 한다할 것이다。나라는 것(굴레)은 수발달린 지네와 같음이라。내가 저들을 필요에 의해 나의 수족같이 만들어 오래되어 부패된 곳을 도려내고 쓰러내고 청소하는 중에 제 手足노릇하는 것이 아직 쓸만한 器物을 망치거나 장래에 유용할 물건들을 손괴시킨다면

 

주제 넘은 짓이라 어찌가만히 있겠는가? 또 다른 수족을 동원해 듣고 칠내기지: 즉 새로운 실력을 쌓을려면 발상부터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남이(어떤 한굴레) 얻어 영화를 누리고 있는 것을 보고 터득해 즉 새로운 실력을 쌓서 할려 한다면 그것은 저들이 영화를 누리는 일편의 수단에 협조한 것이 되었을 뿐 이미 남은 한발 앞서 다른 걸 갖고 영화를 누린다는 것이니 저흐르는 유성의 꼬리만 항상 쥐어 잡게 된다는 것이다。서세동점한 물리가지곤 동세서점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니 달리 길을 모색해봐야 한다는 것이다。이를테면 욕조물에 사람이 들어가면 사람의 부피만큼 물의 높이가 불어난다는 物理를 발견한 서세의 物理는 東方을 점령할지언정 서세를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이니 사람이 그 물에 들어가면 오히려 그 물이 불어나기는 커녕 줄어든다는 物理를 이룩해(人爲的으로라도 발명해 내야한다는 것임)서야지만 저를 대적해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니 이것이 억지부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우리가 所信有无를 떠나서 저들을 흉내내는 가운데 절로 우리에 心身과 財寶와 삶의 영역 및 정신의 價値體系의 혼란을 일으켜 모든것을 다내어 주어서 빈쭉정이 처럼 되어 내쫓기듯 거리방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아무리 저들의 밀어내고자 하는 압력이 거세더라도 대처하는 방안을 깊이 있게 모색했다면 급박한 상황에 다달으는데까진 이르지 않는다 할것이다。정신세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는 것과 같은 생각의 새로운 발상전환은 또 그로한 行爲지음은 남들이 봤을 때 어리석은 듯한 行動을 하는데도 있을 수 있다。하필 총명한듯 한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왜냐? 그 총명이라하는 것도 이미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 정신 세계에 때가 끼인 구태의연한 지식에 의한 것이 많음으로 思考도 그들(人)은 知識을 갖고 利用하고자 하므로 그렇게 됨°(소위 도로아미타불이라는 것) 그것은 곧 남을 따라 하는 서세동점의 논리가 되기 십상인 것이다(※ 醉醒類입네 하는 者들이 先知識운운하나 선지식이 自發覺(제 생각이나 意志대로 하고자 하는 自然스런 깨우침)을 망가트리는 마귀 노릇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복되는 말같지만 남이 하지 않는 異常한 行動 같지만 그런 속에 새로운 착상이 떠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필자가 유년기에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과 가까운 곳에 있게되었는데 그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쇠똥에서도 전기가 나올지 모른다 하시면서 그릇에다 쇠똥을 담아놓고 구리선 토막 두개를 꼽아 놓고선 이따금씩 그 끝을 서로 맞대어 무슨 반응이 혹시 일어나는가를 확인하는 것을 봤다.이처럼 未知의 界에 새로운 것이 있지 이미 남이 터득해 놓은 것을 발판으로 하는 것엔 새로운 기상천외한 物理品이 없다는 것이다. 또 한 예를 든다면 무언가 하고자 하는 속엔 우연에 一致도 돕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지금은 他界하신 이웃 어른에게 들은 얘기다。대장장이가 쇠와 쇠끼리를 이음질할려고 풀무에 달굼질하여 갖은 노력을 다 써봤으나 성과가 없자 속상한 김에「에잇」하곤 서로 붙칠려고 두들기던 쇠를 문밖으로 내던졌더니 마침 비가 온 뒤라 길이 진흙탕물이라 달군 쇠가 그 진흙탕물에 빠져서 식느라고 치이익- 하더란다。그래서 혹시나 하고 줏어 봤더니 아주 잘들어 붙었더라는것이다。이처럼 무언가 하는 곳 속에서 우연에 일치도 돕듯이 새로운 발상도 무언가 하고자 하는 속에 떠오른다 할것이다.